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2019년 ‘올해의 단어’로 ‘기후 비상사태(climate emergency)’를 선정했다. 기후 비상사태는 “기후변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시급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의 검색량은 올해 들어 100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밑을 한 달여 앞두고 올해를 정리한 기사들을 살펴보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절감할 수 있다.
예컨대 세계기상기구(WMO)는 최근 지구의 이산화탄소 연평균 농도(지난해 기준)가 407.8ppm으로 전년(405.5ppm) 대비 2.3ppm 증가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발표했다. 산업혁명 전인 1750년 이전과 비교하면 약 47%나 늘어난 수치다. 페테리 탈라스 WMO 사무총장은 “온실가스 농도가 감소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대체 에너지 개발에 힘을 쏟자는 목소리가 나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주장은 공허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환경 운동가들도 분노와 체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 한데 문제의 해법은 뜻밖의 곳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네 식탁에 오르내리는 고기에서 말이다.
고기가 충분하십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미국은 군인들에게 먹일 고기가 부족해 애를 먹었다. 고깃값이 급등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부는 가격 상한선을 정해 문제를 해결했다. 국민들은 전시임을 고려해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터져 나왔다. 가격 상한제가 사라지자 고깃값은 급등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원하려고 다시 상한제를 도입하려 했는데, 반발한 육류 업계가 고기 출하를 하지 않으면서 ‘고기 기근’ 현상이 벌어졌다. 공화당은 “고기가 충분하십니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민주당은 참패했다. 당시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최근 출간된 ‘클린 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고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사람들이 매일 고기를 먹는 습관을 들이면 자발적으로 고기 소비를 줄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고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60년 이후 지구촌 인구는 2배 늘었는데 동물 생산물 소비는 5배 증가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매년 동물 90억 마리가 도축장으로 향한다. 인류의 앞날을 더 갑갑하게 만드는 건 중국이나 인도처럼 가난했던 나라들의 살림살이가 웬만큼 나아지면서 이들 나라에서도 고기 달걀 유제품 같은 “미국식 식사”를 선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가령 중국인의 1인당 고기 소비량은 최근 30년 동안 5배나 늘었다). 인류는 과연 폭증하는 고기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의 축산업이 더 규모를 키웠을 때 나타날 문제는 무엇인가.
책의 제목인 ‘클린 미트(clean meat)’는 고기 세포를 배양해 얻은 ‘청정 고기’를 가리킨다. 쉽게 말하자면 인조 고기다. 청정 고기가 시장에 자리를 잡는다면 더 이상 동물을 사육하거나 도축할 필요가 없어진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31년에 펴낸 저서 ‘50년 뒤의 세계’에서 “언젠가 인류는 가슴이나 날개를 먹기 위해 닭을 통째로 키우는 모순에서 벗어나 적절한 배양액 내에서 부위별로 닭을 키우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이 전망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저자인 미국 저술가 폴 샤피로(40)는 청정 고기가 급증하는 고기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축산업이 야기하는 문제들까지 해결하는 요술봉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기후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지금과 같은 축산업이 유지되려면 엄청난 넓이의 경작지가 필요하다. 현재 지구에서 얼어붙지 않은 땅 가운데 4분의 1 이상은 가축 방목에, 경작지 중에서 3분의 1은 동물용 사료를 만드는 용도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 해마다 기함할 정도로 넓은 열대우림이 사료용 작물을 키우기 위해 사라진다.
유럽의 권위 있는 싱크탱크인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관계자는 “고기 및 유제품 소비량이 변하지 않는 한 지구의 온도 상승을 섭씨 2도 이내로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한 교수는 말한다. “자동차 버스 트럭 기차 배 비행기 로켓을 모두 합쳐보세요. 그래도 축산업보다는 적은 온실가스를 배출합니다.” 현재의 축산업은 환경에만 치명타를 가하는 게 아니다. 훗날 판데믹(전염병의 세계적인 유행)을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육장이나 도축장에서 일어나는 동물 학대와 관련된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정 고기는 “인류를 살릴 궁극의 고기”가 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커다란 발효조에 세포를 배양해 고기나 가죽을 만드는 광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부엌마다 고기 제조기가 놓일지도 모른다. 한 과학자는 전망한다. “참치 소 돼지 등 어떤 동물이든 줄기세포를 티백 형태로 판매하여 부엌에서 편안하게 나만의 고기를 키울 수 있습니다.”
식량 혁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청정 고기의 짧은 역사를 전하면서 이 고기를 상용화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스타트업 기업들의 현황을 전한다. 이들 기업의 대표를 만나 인터뷰했고, 청정 고기를 둘러싼 각종 논란도 취재했다. 청정 고기가 허점투성이인 현재의 축산업을 어떻게 갈아엎을 수 있는지 자세히 들려주는데, 책을 읽으면 청정 고기로 대표되는 ‘세포 농업’의 파워를 실감하게 된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과학 용어가 한가득 실렸을 것으로 넘겨짚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업계 내부자들한테서 그러모은 인상적인 목소리를 깁고 엮어서 근사한 교양서를 만들어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유머러스한 문장도 책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무엇보다 현재의 축산업이 어떤 살풍경을 연출하는지 되새겨보게 만든다.
물론 청정 고기의 미래가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각 나라 정부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축산업계의 로비에 휘둘리기 쉽다. 일반 고기보다 비싼 가격도 풀어야 할 숙제다(2017년 기준 청정 고기 생산 비용은 0.45㎏에 11.36 달러로 일반 고기보다 9~10배 높다). 현재로서는 햄버거 패티처럼 다진 고기만 가능할 뿐 ‘두꺼운 고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소비자들이 청정 고기를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즐겨 먹게 될는지도 단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청정 고기가 성공하지 않는다면 현재 축산업이 품은 문제는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문은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로 일급의 석학으로 자리매김한 유발 하라리가 썼다. “머지않아 우리는 산업 동물을 사육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인류 역사의 어두운 단면인 노예제도처럼 끔찍하다고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의 조심스러운 예언처럼 후대의 사람들은 양계장 돼지농장 도축장 같은 단어를 사전에서만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