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균·임경섭의 같이 읽는 마음] 법의학자가 풀어내는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입력 2019-11-30 04:03
법의학자는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어가 죽음의 배후를 캐는 사람이다. 리처드 셰퍼드는 평생을 이 일에 바친 영국의 법의학자인데, 최근 출간된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에는 그가 지금까지 마주친 기구한 죽음의 사연이 빽빽하게 실려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이 개봉했을 당시 나는 군인이었다. 상병 때였던 것 같은데, 나는 짧은 휴가를 나와 극장을 찾았다. 그날 극장 안에서 받았던, 명백하게 흥미로우면서 고통스러웠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게 느껴지곤 한다. 박해일(그가 연기한 영화 속 용의자 이름은 박현규)이 진짜 범인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당시 사회적으로도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부대로 복귀한 나 역시 이미 영화를 본 고참들과 그의 진범 여부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토론을 했었다. 나름의 논리들로 무장한 토론이긴 했지만, 결론은 만장일치였다. 박해일이 범인이라는 거였다.

같은 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항상 유쾌한 성격으로 따뜻하고 꼼꼼하게 부대원을 돌봐주던 중대 행정보급관으로부터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중학생 딸아이가 며칠째 실종 상태다. 아이 찾는 것을 도와 달라.” 경찰에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였고, 또한 상부 부대의 허가를 받기 쉬운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복을 입고 거들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중대 간부들의 사복을 빌려 입은 나와 부대원들은 며칠 동안 부대 주변과 보급관 자택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결국 우리가 찾지는 못했고, 몇 개월이 지나 경찰에 의해 어느 배수로 안에서 그의 딸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 사건이 바로 ‘포천 여중생 살인 사건’이다. 더 가슴 아픈 건, 이 사건이 아직 미제라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을 본 지, 영화 속 진범에 대해 토론하면서 함께 공포에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사건을 현실에서 경험했다. 우리가 경험한 사건은 자연스럽게 화성 연쇄 살인 사건과 연결되었고, 우리는 화성의 살인마가 포천에 다시 나타난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속 박해일이 진짜 범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영화의 전개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는 결국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범인이어야 했는데 범인이 아니게 된 범인. 이런 마음들이 만든 결론이 시대의 살인 사건을 더 깊은 미궁으로 빠뜨려버렸던 건 아닌지.

어찌 되었든, 사건 발생 33년 만에 진범이 밝혀지는 듯하다. 아직 진범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이 유력 용의자가 진범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얼마 전 유전자 감식과 자백 등을 통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이춘재가 바로 그다. 이춘재의 등장은 워낙 큰 이슈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슈의 무게만큼 많은 언론에서 이 사건이 상세히 다루어졌고, 나 역시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분석들을 접할 수 있었다. 평소 ‘그것이 알고 싶다’의 열혈 시청자이기도 한 나에게, 또한 포천 사건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나에게 이춘재 이슈는 최근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점에 관심이 가는 신작 도서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지난해 영국 더 타임스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던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가 그것이다. 책은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 리처드 셰퍼드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셰퍼드는 스스로 “법의병리학자로서 그동안 2만구 넘는 시신을 부검했다”고 고백할 만큼 작은 사건들에서부터 9·11 테러 같은 굵직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해왔다.

책은 1987년 일어난 헝거포드 사건과 관련한 내용으로 시작해 발리 폭탄 테러나 다이애나비 사망 사건 등 무수한 사건들에 법의학자로 참여해 그것들을 해결해나간 과정을 그리고 있다. 30년의 법의관 생활에 대해 솔직하고 상세하게 털어놓은 이 회고록은 자연사와 수상한 죽음, 살인 사건과 정당방위, 아동학대와 돌연사 등 다양한 사건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도서 카테고리는 ‘사회과학’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문장가가 쓴 한 권의 자전소설을 읽는 듯한 편안함과 흥미로움이 이 책의 매력이다. 다만, 법의학자의 현장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책이므로 편안한 사건들이 놓여 있는 건 아님을 미리 염두에 두시길.

<임경섭·출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