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페미니스트 男 일깨워 성갈등 프레임 깨야”

입력 2019-11-30 04:03
나윤경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 본원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나 원장은 “성평등주의에 동의하지만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샤이 페미니스트’ 남성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올려 우리 사회가 성갈등을 겪는다는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지난 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농촌의 남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농림축산식품부 간 업무협약(MOU) 체결식이 열렸다. 농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성인데 의사결정권은 18%에 불과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농촌 지역 양성평등 교육을 확대하고 이를 전담할 전문강사를 육성키로 했다.

나윤경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 본원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나 원장은 이 자리에서 “농식품부에서 먼저 제안한 것인 데다 농식품부 안에서도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놀랐다”고 말했다. 여성인 농식품부 담당과장이 투쟁 의지를 불태우며 국장과 차관에게 사업보고서를 갖고 갔는데 국장과 차관이 의외로 흔쾌히 허락하고 적극 밀어줬다는 것이다. 나 원장은 “(농식품부) 국장과 차관 모두 50대 남성”이라며 “성갈등을 야기하는 소수의 남성이 아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런 ‘샤이 페미니스트’ 남성을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 4월 개최한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세미나에서 과도기적 남성성을 보이는 30대 이상 남성을 주목했다. 자녀를 양육하는 남성이 오히려 성평등운동의 주요 지지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이들이 실질적인 변화를 추동하게끔 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런 ‘샤이 페미니즘’ 분위기는 젊은층으로 갈수록 짙게 나타난다고 나 원장은 분석했다. 육군사관학교가 올 상반기 필수과목으로 도입한 여성학 강의에 학생들이 적극 반응한다는 것이다. 국방부 방침에 따라 올해 입학한 육사 1학년생부터 1주일에 2시간씩 2학점짜리 ‘성평등 리더십의 이해와 실천’을 1학기 동안 이수해야 한다. 나 원장은 “군대에서 성폭력이 빈번히 일어나는데 군사재판 판결은 황당하기 그지없고 사건이 잘 해결되지도 않는다”며 이런 문제의식이 육사 교수진 사이에 형성됐고 교수들이 “성평등으로 가는 사회적 흐름에 군대도 발맞춰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날 때마다 간략한 에세이를 제출해야 한다. 이 에세이에는 ‘여성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지 여태껏 너무 모르고 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동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가’ 등의 성찰적 글이 많았다고 한다. 하반기부터는 해군과 공군사관학교에서도 여성학 수업이 진행된다. 그는 “2학점짜리로는 불충분하다”며 “2, 3학년까지 (과목을) 확대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군대도 바뀌는 상황에서 최근 정치권에서 모병제 얘기가 나온 데 대해 나 원장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20대 남성의 표심을 얻으려 모병제를 꺼낸 것이라면 그 진단도, 해결책도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그는 “징집에 대한 젊은 남성의 불만은 여성이 아닌 편법으로 군대에 가지 않는 일부 고위층을 향해야 한다”며 군대 문제가 성갈등의 소재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성평등 교육이 일상화됐지만 일부에선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난 5월 경찰청 고위 간부를 대상으로 한 성평등 교육이 대표적인 예다. 경찰서장 승진 대상자 50여명과 일반 부처·공공기관 임원 승진 대상자 1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교육에선 “피곤한데 귀찮게 토론시키지 말고 강의하고 일찍 끝내라” “왜 내가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냐”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교육을 진행한 권수현 여성학 박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를 올리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여가부에선 이례적으로 회의가 소집됐고 민갑룡 경찰청장은 공개 사과했다.

나 원장은 “그래도 군·경이 변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실제 교육 현장을 가보면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특권을 되돌아보는 기성세대가 많다”고 호평했다. 경찰은 지난 10월 경찰 상징인 ‘포순이’ 캐릭터의 디자인을 치마에서 바지로 바꾸는 등 중앙부처로서는 처음으로 자체 훈령과 예규에 있는 성차별적 요소를 개정했다.

이런 측면에서 나 원장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으로 촉발된 성갈등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20대 남성이 영화를 보고 역차별에 분노한다는 프레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혹평하고 악의적 댓글을 다는 남성 중 실제 자신의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똑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반문하며 “그런 말 했다간 여자친구 또는 아내와의 관계가 깨지는데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 원장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소수이고 현실에선 꺼낼 수조차 없다는 점 때문에 댓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언론 등이 괜히 이 사람들을 부각해 성갈등을 부추기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여성주의와 함께하는 남성을 소수화하고 드문 남성으로 취급하는데 실제론 이런 ‘샤이 페미니스트’ 남자가 다수”라며 “이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올려 우리 사회가 성갈등을 겪는다는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원장은 “성평등은 시대적 흐름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온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조선 말기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처음엔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반발하는 이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니 사회 전체가 따라가지 않았느냐”며 “혁명적 사고방식과 이를 실천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 사회는 이런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고 했다. 나 원장은 “성갈등이냐 새로운 남성의 탄생이냐는 결국 프레임 짜기 나름”이라며 “새롭게 태어난 남성은 성평등이라는 관념을 실천하고 확산할 중요한 키를 쥔 사람”이라고 역설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