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이 가라앉은 뒤 맑아진 물 같은 회화

입력 2019-11-30 04:04
김택상 작 ‘숨쉬는 빛-여린 진달래 색’.

1990년대 초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화산 분화구에 고인 물빛을 우연히 본 김택상(61) 작가는 ‘이거다’ 싶었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작업을 해오면서 유화 물감의 번쩍거리고 찐득한 느낌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더욱이 캔버스 표면 위에 색을 겹겹이 칠해나가는 서구의 회화 실현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것을 찾고자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단색화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작가는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 ‘색과 빛 사이에서’를 하고 있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포스트 단색화’로 분류되는 자신의 회화의 탄생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양미술사가 우리 것이 아니니 우리 풍토성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물빛에서 길을 찾은 거지요.”

작가는 독특한 제작 양식을 고안했다. 완만하게 오목한 판에 틀을 고정시킨 후 극소량의 아크릴을 희석한 물을 붓고 수성 캔버스가 잠기도록 한다. 용해된 미세한 물감 알갱이는 채로 거른 물질의 입자와도 같이 그윽하고 부드러운 색조로 캔버스 깊숙이 침전되며 색을 입힌다. 이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 색이 짙어져 그가 꿈꾸었던 ‘빛의 회화’가 탄생한다. 미술평론가 홍가이는 그의 작품 세계를 두고 “비가 내린 후의 흙탕물이 시간이 흘러 부유물이 가라앉고 맑아진 것과 같은 이치”라며 ‘담화(淡畵)’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시행착오도 무수히 겪었다. 처음엔 한지로 제작했으나 크기에 한계가 있었다. 광목은 곰팡이가 생겼다. 캔버스 천은 물감 알갱이가 미끄러져 침착이 안됐다. 그럴 때 일본에서 쓰이는 수채화용 캔버스를 찾아냈다. 서양화를 일찍 수용했던 일본이 자기식 재료를 개발한 것이다. 그의 단색화는 캔버스 천의 섬세한 올 위로 오랜 시간이 빚어낸 색들이 은은한 빛을 낸다. 작가는 “장맛은 오래 묵을수록 발효돼 제맛이 난다. 장맛 같은 회화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내년 1월 10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