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장지영] 카르멘과 페미사이드

입력 2019-11-27 04:02

프랑스 오페라 ‘카르멘’은 세계에서 인기 있는 오페라를 꼽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다.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이 작품은 스페인을 배경으로 군인 돈 호세와 집시 출신 여공 카르멘의 사랑을 다뤘다. 카르멘의 미모에 매혹된 돈 호세는 상관을 죽이고 탈영한다. 하지만 카르멘의 마음이 투우사 에스카미요에게로 옮겨가자 질투에 사로잡혀 카르멘을 죽이고 만다. 카르멘은 1875년 초연 이후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한 뒤 파괴하는 ‘팜므파탈’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카르멘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로 보는 해석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 뒤 울부짖는 장면은 안타깝고 슬픈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

최근 오페라계는 연출가가 새롭게 작품을 해석하는 ‘레지테아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오페라 카르멘의 경우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바꾼 사례가 간간이 나왔지만 등장인물이나 결말까지 새롭게 보여주는 연출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원작과 다른 결말을 보여준 연출이 나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남성 연출가 레오 무스카토는 카르멘이 자신을 죽이려는 돈 호세를 죽이는 것으로 끝냈다. 원작에도 돈 호세가 변심한 카르멘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무스카토는 돈 호세의 폭력에 초점을 맞춰 카르멘이 돈 호세를 정당방위 차원에서 죽였다고 재해석했다. 무스카토는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무스카토의 연출에 대해 보수적인 팬들은 원작을 훼손했다고 분노했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카르멘은 아무리 음악이 아름다워도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를 정당화하는 작품이라 늘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애·동거·혼인 상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가리켜 ‘페미사이드’라고 정의한다.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 끝에 살해되는 여성은 물론이고 지속적인 폭력 끝에 자살을 택하는 ‘페미사이드 자살’은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범죄를 예방하지도, 제대로 처벌하지도 않고 있다.

페미사이드 희생자 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페미사이드 범죄가 여성 혐오의 만연과 함께 증가 추세다.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올해 페미사이드 희생자가 150명에 이를 것으로 조사됐다. 중남미의 경우는 훨씬 더 많다. 유엔은 지난해 멕시코에서 매일 9명의 여성이 살해됐으며 전체 여성의 41%가 폭력을 당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페미사이드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지난 8월 올해 100번째 페미사이드 사건이 발생한 프랑스는 수십개 도시에서 전례 없는 시위가 열렸다. 지난 9월부터 대책 마련에 나섰던 프랑스 정부는 25일 ‘가정폭력 및 여성살해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프랑스 정부는 형법을 비롯한 관계 법령을 개정해 페미사이드를 저지르거나 페미사이드 자살을 유발한 남성에 대한 처벌 규정을 명시하는 한편 여성 상대 폭력을 행사한 남성에게 전자발찌도 채우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통과돼 올해 12월 25일부터 ‘여성폭력방지 기본법’이 시행된다.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이 법이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위반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여성을 보호하는 이 법이 여성을 법적 특수계급으로 인정함으로써 평등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 법으로 침해되는 기본권이 불확실하다며 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현실적으로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 묻지마 범죄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다. 이 법은 위헌적인 것이 아니라 진일보한 인권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좀 더 보완하면 된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