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해안포 쏴라”… 직접 ‘대화의 문’ 닫는 김정은

입력 2019-11-26 04:0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 남북 접경 지역인 창린도 방어부대를 방문해 해안포로 추정되는 무기 앞에서 병사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조선중앙TV가 25일 보도한 장면이다. 김 위원장은 이 부대에서 목표물을 정해주고 사격을 해보라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를 요구한 데 이어 이번에는 서해 접경 지역에서 해안포 사격을 실시하며 남북 간 적대행위 중지를 약속한 9·19군사합의를 위반했다. 연평도 포격 도발 9주기(11월 23일)에 즈음해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초청을 거절한 지 나흘 만에 또다시 남북 대화를 강하게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날린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창린도 방어대를 비롯한 서부전선을 시찰했다고 25일 보도했다. 해안포 사격은 창린도 방어대의 해안포중대가 실시했다. 이는 9·19군사합의 위반이다. 이 합의서 1조 2항에는 ‘서해 남측 덕적도 이북부터 북측 초도 이남까지의 수역에서 포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을 중지한다’고 돼 있다. 창린도는 황해도 남쪽에 있는 섬으로, 군사합의에서 해안포 사격을 중지키로 한 완충구역에 포함돼 있다.

한국군 당국은 북한의 해안포 사격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매체 보도 전에 이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언제 몇 발을 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지난해 남북이 맺은 합의 중 사실상 유일하게 지켜졌던 9·19군사합의 위반 사실을 미리 공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 합의는 지난해 9월 남북 정상이 체결한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됐으며, 사실상의 불가침 합의서로 평가됐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해안포중대 2포에 목표를 정해주며 한번 사격을 해보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하면서 김 위원장의 직접 지시에 의한 사격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군사 전문가들은 갱도에서 레일로 이동하는 76.2㎜ 해안포를 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정보 능력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해안포 사격 여부를 포함해 대북 정보를 모두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유감을 표명했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해안포 사격훈련은 지난해 남북 군사 당국이 합의하고 그간 충실히 이행해 온 9·19군사합의를 위반한 것”이라며 합의 준수를 촉구했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막일에 사격 사실을 공개한 점도 의도가 있어 보인다. 대북 제재에 막힌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남측이 주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북·미 비핵화 협상 동력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로도 분석된다.

다만 북한이 대화의 끈을 완전히 끊지는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 매체는 해안포 사격 장면을 공개하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사격이 이뤄진 점을 내비치며 수위 조절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예고 없이 왔는데 모두가 경각성 높이 전선경계근무를 서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지난해 맺어진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의 생명력을 끝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