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쓰나미가 만든 선거혁명”… 홍콩 다시 춤추다

입력 2019-11-26 04:01
홍콩 민주화 시위 지지자들이 25일 구의원 선거 개표 결과 친중파의 대표적인 후보로 분류돼온 주니어스 호가 낙선한 사실을 확인하고 환호하고 있다. 주니어스 호는 패배 직후 페이스북에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올해 홍콩은 완전히 미쳤다”는 글을 올렸다. AP연합뉴스

구의원 선거가 친중 진영의 궤멸적인 패배로 결론나자 홍콩 현지에선 “불만의 쓰나미가 홍콩을 쓸어버렸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중국 본토는 선거 결과를 애써 무시하면서도 사실상 패닉상태에 빠진 분위기다. 송환법 반대 시위가 시작된 지난 6월 이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온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5일 도쿄에서 홍콩 선거 결과에 대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홍콩은 중국의 일부이며 중국의 특별행정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중국 매체들은 입장 정리가 안 된 듯 오전 한때 침묵을 지키다 뒤늦게 옹색한 평가를 내놨다. 관영 환구시보는 사평에서 “송환법 ‘풍파’로 범민주 진영이 단기적으로 동원력에 힘을 얻었을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신문은 “대다수 홍콩인은 이미 폭력에 신물이 났으며 질서를 되찾기를 바란다”고 강조하며 서방 배후설도 거론했다.

반면 홍콩에서는 이번 선거를 친중파를 궤멸시킨 ‘선거혁명’으로 평가하며 향후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거리 시위에서 비롯된 반정부 물결이 홍콩 투표소를 휩쓸었다”며 “친중 진영은 압도적인 패배의 충격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이번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은 홍콩의 도심과 교외, 부유층 또는 서민 거주지역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거뒀다. 특히 지미 샴 민간인권전선 대표 등 시위를 이끌었던 젊은 후보들이 대거 당선된 것은 민심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시위대를 두둔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에 따라 홍콩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주도해온 람 장관은 더욱 코너에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 친중 진영에서는 람 장관 체제를 이대로 끌고 가면 내년 입법회(국회의원) 의원 선거 등 향후 정국에서도 참패가 불가피하다며 ‘교체론’이 나오고 있다. 빈과일보는 홍콩 친중 정치인들 사이에서 “이번 선거는 인재”라며 람 장관을 탓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람 장관은 당초 지난 6월 송환법 반대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책임론에 시달려왔고 최근에는 조기 경질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달 초 상하이에서 람 장관을 만나 지지를 표명하고 홍콩 시위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문하며 경질설을 잠재웠다. 하지만 이번 구의원 선거에서 홍콩의 민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만큼 교체할 시기가 됐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홍콩 사태에 직접 발을 담근 시 주석도 위상에 큰 흠집을 남겼다. 시 주석은 해외순방 중에도 홍콩의 폭력행위 근절을 강력히 주문했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홍콩 시민들의 반중 정서가 강하게 표출되면서 체면을 구겼다. 홍콩 시위에 대한 그의 강경대응 지시가 홍콩 내 친중파 약화 및 대만의 반중 분위기 확산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만에서는 홍콩 사태 여파로 반중국 성향의 차이잉원 총통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앞세워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대만 통일까지 염두에 뒀던 시 주석의 ‘중국몽’ 구상도 흔들리게 됐다. 이에 따라 중국 중앙정부가 홍콩에 대한 정책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콩 교통주택부 장관을 지낸 앤서니 청은 “중국 중앙정부는 폭력 종식을 강조해 왔지만 이제는 홍콩의 민심을 헤아려 접근 방식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