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은성수] 모두를 위한 금융안전장치, 포용금융

입력 2019-11-26 04:02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으로 재직하던 2016년 여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다름 아닌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 콘퍼런스’ 초청장이었다. 참석자 명단을 살펴보던 중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국제 금융계의 거물들이 총출동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금융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인 린 로스차일드가 주최하고,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몬 회장 등 금융계는 물론 펩시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 인사들도 눈에 띄었다.

왜일까? 최고의 자본가인 이들이 모여서 왜 ‘포용’을 논의하는지 궁금해졌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금융회사들이 단기 수익 창출에만 급급한 나머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금융위기 이후 소득 양극화가 심해지고 거시경제 불안정성이 높아졌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을 위한 장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 전체적으로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자신들만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포용금융은 뒤처진 사람을 앞으로 끌어당겨 경제활동에 재유입하는 생산적인 활동이다. 이는 국민의 복지 증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의 디딤돌 역할을 한다.

문재인정부는 지난 2년반 동안 이 같은 금융의 포용성 강화에 더욱 힘써 왔다. 먼저 서민의 금융 접근성 제고를 위해 서민자금 공급을 확대했다. 햇살론 등 정책서민금융 상품 공급을 2조원 이상 늘렸다. 사잇돌대출 등 민간 금융기관도 중금리 대출 규모를 5배 확대했다. 햇살론17 등을 통해 보다 어려운 분들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채무조정제도에서도 과감한 변화가 있었다. 소득능력 평가를 바탕으로 해 64만명의 장기소액연체자의 채무를 정리했다. 금융기관이 보유 중인 365만건의 소멸시효 완성채권도 소각하였다. 개인회생 최대 변제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하고, 신용회복위원회의 최대 감면율도 70%로 확대하였다.

마지막으로 서민들의 과도한 금융부담을 완화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법정 최고금리를 27.9%에서 24%로 인하하였다. 카드 수수료 인하를 통해 260만명 이상의 자영업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다. 금융소비자보호법도 법안이 발의된 지 8년 만에 국회에서 제정 작업이 가시화되고 있다.

포용금융 정책은 현재진행형이다. 가계금융이 급속하게 확대된 만큼 여기저기 보완할 사항이 많다. 현재 연체채무자의 권익 보호와 재기 지원 강화를 위해 소비자신용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휴 폐업한 자영업자들이 채무조정과 자금 지원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자영업자 재기 지원 프로그램도 25일부터 시행됐다. 정책 서민금융의 지속성 강화를 위한 안정적 재원 확충 방안도 관계기관과 계속 협의 중이다.

금융은 사정이 어려워진 사람에게 불이익을 부과하는 특성이 있다. 신용도가 낮으면 더 높은 금리를 부과하고 연체되면 연체 이자까지 추가 부과한다. 이러한 불이익이 일시적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영영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이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고 정상적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 이것이 바로 포용금융의 역할이다.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할 부분은 도덕적 해이다. 서민 취약계층의 자활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채무를 안 갚고 버티면 해결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우려를 방지하기 위해 포용금융 정책은 철저한 상환 능력 심사를 전제로 운영되고 있다. 질병 사고 실직 등 정말 빚을 갚기 어려운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지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입각해 판단하는 것이다.

한번 경기에서 패하더라도 패자부활전을 통해 최종 우승하는 경우가 있다. 경제적으로 정상궤도에서 한번 이탈한 사람에게도 다시 본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야 실패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도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체 채무, 자금 부족 등이 문제라면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아보자. 재기에 성공하는 그날까지, 포용금융은 우리 곁에 함께한다.

은성수 금융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