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4일 작심한 듯 “영어로 트라이 미(try me)라는 얘기가 있다. 어느 한쪽이 터무니없이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계속 자극할 경우 ‘그래? 계속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라는 경고성 발언”이라며 “유 트라이 미(You try me?), 그런 말을 일본에 하고 싶다”고 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양국 간 막판 협의를 통해 지난 22일 극적으로 조건부 ‘종료 유예’됐지만 겨우 한 고비를 넘겼을 뿐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다음 달로 예상되는 한·일 정상회담 이전에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에서 양국이 접점을 찾아야 하지만, 지소미아 종료 결정 유보 이후 양국에서 흘러나오는 입장차는 여전히 크다.
정 실장은 24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리는 부산 벡스코 프레스센터에서 지소미아 종료 유예 이후 나온 일본 정부 인사들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면서 지소미아 종료 유예,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중단 등에 대해서도 “모두 조건부였다. 앞으로의 협상은 모든 것이 일본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실명으로, 그것도 다른 현안으로 정상회의가 열리는 국제외교 현장에서 상대 국가를 직접 비판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렇듯 한·일 양국이 지난 22일 지소미아 종료 유예와 수출규제 관련 국장급 대화 추진 등을 한·일 간 합의 발표 뒤 불과 이틀 만에 불협화음이 공개적으로 표출되면서 향후 협상 진전도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당장 다음 달로 조율 중인 한·일 정상회담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정도로, 시간표는 빠듯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다. 회담 전에 일본 측이 수출규제를 해제하고 강제징용 관련 해법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와야 한·일 정상회담에서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율이 성사될 경우 한·일 정상은 다음 달 말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예정된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회담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한·일 정상회담 성사 여부와 관련해 “현 시점에서는 정해진 게 없다”며 “진행되는 상황들을 봐가면서 다음 스텝(단계)을 고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지난 23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 후 기자들과 만나 “(한·일 간) 서로 회담이 가능할 수 있도록 조율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소미아 종료 조건부 유예 이후 일본에서 나오는 발언들을 고려하면 양국의 온도차는 크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소미아 종료 유예와 관련해 “일본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미국이 상당히 강해서 한국이 포기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은 수출규제 조치 철회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 해결에 대해 방점을 찍는 분위기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은 전날 강경화 장관과 만난 뒤 기자들에게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 이후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자산이 현금화된다면 한·일 관계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을 만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일본이 제의하는 현실적 제안도 우리가 얼마든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준비가 돼 있다고 계속 일본 측을 설득하고 있지만 아직 진전이 전혀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부산=임성수 기자, 박세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