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여배우 엄마와 딸… 숨겨진 진실과 오해

입력 2019-11-26 04:08

딸은 엄마에게 평생 서운했다. 대배우인 엄마는 늘 가정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어릴 적 하굣길에 마중을 한 번 나온 적도, 다정히 머리를 빗겨준 적도 없었다. 배역을 위해서라면 절친한 친구마저 배신하는 못된 ‘마녀’일 뿐이었다.

그런 엄마가 회고록을 냈다. 축하해주기 위해 남편, 어린 딸과 함께 오랜만에 엄마 집을 찾았다. 하지만 회고록을 읽어보고 딸은 크게 실망한다. 책에는 진실이 없었다. 책에 묘사된 다정다감한 엄마는, 자신의 기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사진)은 그의 첫 글로벌 프로젝트다. 프랑스 대배우 까뜨린느 드뇌브가 가정에 소홀한 엄마이자 자기애 충만한 배우 파비안느 역을, 세계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최초의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가 딸 뤼미르 역을 맡았다.

등장인물은 전부 해외 배우들이고, 감독의 모국어인 일본어는 단 한마디도 쓰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레에다의 인장만은 선명히 찍혀있다. ‘아무도 모른다’(2004)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어느 가족’(2018) 등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가족애를 전한다.

극의 분위기는 대체로 활기차다. 흔히 예상하는 구구절절함을 떨쳐낸다. 엄마와 딸이 오해를 풀고 조금씩 화해하는 과정이 위트 있게 그려지는데,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가 서사에 힘을 싣는다. 드뇌브와 비노슈가 주고받는 감정들이 매 순간 정교하고도 섬세하게 묘사된다.

영화는 한편으로 배우가 겪는 고뇌에 대해서도 건드린다. 늘 극도의 예민함으로 가득 차 있는 파비안느는 때로 현실과 연기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파비안느의 사위이자 뤼미르의 남편인 행크(에단 호크)는 미국의 B급 TV 배우로, 장모의 무시에 상처를 입곤 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연기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고백했다. “나쁜 엄마, 나쁜 친구여도 좋은 배우인 편이 나아. 네가 용서 안 해줘도 세상이 나를 용서해.” 극 중 파비안느가 딸에게 던지는 이 대사가 어쩐지 공허하고도 쓸쓸하다. 다음 달 5일 개봉. 107분. 12세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