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조건부 연기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세계무역기구(WTO) 시계’도 잠시 멈춰섰다.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협의 테이블에 수출규제 중단을 공식적 주제로 올릴 수 있게 된 걸 ‘실익’으로 평가한다. 양국 협의 채널을 국장급으로 올리면서 무게를 더한 점도 이득이다. 한국은 대화 성과를 최대치로 끌어내기 위해 WTO 제소 절차를 일시적으로 중지할 방침이다.
일본 정부도 현안 해결을 위해 국장급 회의에서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다만 일본 언론은 “한국이 WTO 제소 중단을 먼저 제시했다”며 자국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다. 향후 열릴 국장급 회의도 입장 차이에 따른 진통이 예상된다. 한국 정부는 양국 협의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으면 언제든 WTO 제소 절차를 재개하겠다고 강조한다. 양국 대화가 장기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어 일본의 수출규제도 상당 기간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산업통상자원부 핵심 관계자는 24일 “WTO 제소 자체를 중단하는 게 아니다. 일시적으로 WTO 패널 절차를 중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동안 공식적인 협의를 피해왔던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협의 테이블에 올리고 대화에 나서겠다는 전향적인 태도를 내비친 점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협의 주제가 ‘수출규제 정당성’에서 ‘수출규제 철회 여부’로 바뀐 점도 ‘실익’”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7월 한국의 요청으로 가진 양국 협의는 ‘과장급’으로 열렸었다. 일본은 정부 간 협의가 아닌 ‘설명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나마 양국의 대화가 진행된 무대는 제3자의 중재가 개입된 WTO 양자협의였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합의에 따라 국장급 대화가 공식적으로 열리면 ‘첫 대화’로서 의미가 무겁다.
일본 정부도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일본 내에서도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철회하는 식의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만 양국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고 주문한다. 다만 일부에선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강조한다. 한국 정부가 WTO 제소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먼저 일본에 전달했고, 이에 일본 정부가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복원을 위한 정책 대화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산업부는 일본이 국장급 회의에 앞서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블러핑’ 전략을 택했다고 본다. 한국 정부도 언제든지 ‘WTO 제소’ 카드를 다시 꺼내 일본을 압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산업부 관계자는 “대화에 진전이 없으면 곧바로 WTO 패널 절차에 들어갈 준비를 해놨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화 국면에서도 일본이 수출규제를 유지해 한국 기업의 중장기적 피해가 우려된다. 단기적으론 한국 기업들의 기민한 대응으로 피해가 적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양국 산업 침체 등의 부정적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 기업들은 협상 기간만큼 불확실성을 안고 있어야 한다. 합의가 도출되지 않아 한국 정부가 WTO 제소를 재개하더라도 재개 시점부터 약 2년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만큼 갈등 해소 시점도 미뤄진다.
산업부는 우선 국장급 대화에 수출규제를 정식 의제로 올릴 수 있도록 과장급 실무협의 준비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국장급 협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 그 전에 과장급 실무협의를 통해 백색국가 제외 등 협의 테이블에 올릴 정식 의제를 합의할 계획이다. 최대한 많은 의제를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