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혜련 (8) 개그맨 시험에 떨어진 후 ‘일본불교’에 심취

입력 2019-11-25 00:01
고모가 권유한 일본 종교를 반강제적으로 믿어야 했던 조혜련 집사(둘째 줄 왼쪽 네 번째)와 가족들.

부모님이 1978년 경기도 군포시 산본으로 이사 오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모는 우리 가족에게 믿으면 좋은 종교가 있다며 소개했다.

“일본에서 건너온 불교라는데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수행하는 거라고 하더라. 이 종교가 남들도 좋다고 하니까 한 번 믿어봐라.” 열심히 믿으면 스스로가 자기 속에 있는 부처의 불성(佛性)을 끄집어 낸다는 종교였다. 고모는 우리 가족에게 일본불교를 권유해놓고 정작 본인은 믿지 않으셨다.

잘 사는 딸이 종교를 믿으라고 권유하니 할머니는 우리 가족에게도 강요했다. 고모가 산본에 가진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작농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명령을 따라 이 종교를 믿어야 했다.

나는 강제로 종교를 가지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싫어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맏언니는 교리까지 공부해가며 가장 열심히 그 종교를 믿었다. 내가 개그맨 시험에 낙방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언니는 나에게 열심히 그 종교에 관해 설명을 해주며 믿도록 권유했다. 열심히 종교활동을 하면 용돈을 매일 준다는 조건까지 내세웠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나는 이왕 하는 거 정성을 다해 도전하고 꼭 개그우먼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종교에서 하는 행위 중 하나는 한 구절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원’이라고 한다. 기원을 하기 위해 찾는 장소를 ‘회관’이라고 부른다.

나는 매일 도시락을 싸 들고 회관에 가서 기원했다. 하루 열 시간씩 100일 간 도전했다. 그것을 ‘백만편 도전’이라고 부른다. 하루 10시간 동안 회관에 앉아 기원하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났다. 그래도 다리 사이에 방석을 2개씩 끼워 넣고 참아내야 했다.

100일간의 기원을 달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개그우먼이 됐다. 100일 기원을 달성한 나의 기원 덕분이라고 여겼다. 그 뒤로 더욱 종교활동을 열심히 했다. 어느 순간 나는 한국에서 그 종교의 대표적인 연예인이 됐다.

이 종교의 체험담을 전하기 위해 전국 집회도 다녔다. 일본에서도 방송 활동을 하면서 외롭고 힘들 때면 도쿄에 있는 회관을 찾아가서 마음을 다스렸다. 일본 연예인이나 스포츠인, 정치인 등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교류 하며 위로를 삼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대집회가 열리면 다같이 모여서 그 종교를 이끄는 회장의 연설을 들었다. 그분을 존경하며 그 마음을 담아내려고 애썼다.

회장의 생일이 되면 일본 도쿄 중심가에 있는 회관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다. 회장에게 생일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줄을 섰다. 나도 최고급 과일을 사서 줄을 섰다. 나를 비롯해 그곳에 줄을 선 사람들은 멀리서나마 그 회장의 얼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긴 기다림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일본불교는 이렇게 내 인생의 긴 시간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 나이 마흔 살이 넘어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우울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했던 종교활동도 나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내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스레 나의 믿음도 서서히 약해지고 식었다. 일본불교 활동을 그만둔 뒤 이른바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른다는 유명인사가 보이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난 또 다른 진리를 갈구하며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내가 찾는 진리가 있을 거야!’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