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이면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경남 거제 새옥포성결교회당이 꽉 찼다. 전국에서,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2년만 있다가 나오자 했던 거제도 교회에서 7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2002년이면 남편인 오창균 전도사가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할 상황이 됐다. 2001년 하반기 우리 부부는 기도하며 조심스레 교회 개척을 의논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둔 아버지는 당신이 은퇴하실 때까지 함께 교회를 돌보며 주의 일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울림이 있었다. 2년 더 있다가는 교회를 개척하기에 다소 늦은 나이가 될 것 같았다. 솔직하게 우리 형편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기꺼이 우리 부부를 밀어주셨다.
기도로 준비한 덕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교회를 개척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처에서 몰려오던 환자들이 개척멤버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거제도 교회를 사임하고 2002년 2월 교회 개척지를 일단 부산 화명동으로 정해 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해 4월 14일 개척 예배를 부산 금정산에 있는 가나안수양관 소예배실에서 드렸다. 교회명은 대망교회라고 지었다. 대망(大望)은 큰 소망으로, 영어로 하면 ‘그레이트 비전’(great vision)이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나오는 선교대명령을 수행하는 교회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예배드릴 장소도, 돈도 없었다. 가나안수양관 원장님의 배려로 소예배실을 예배처소로 사용했다. 금요철야예배는 기도원예배 때문에 목요일로 옮겼다. 개척예배를 드린 후 남편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7년 차 영남지역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회에는 개척교회답지 않게 많은 성도가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세상에서는 희망도 없고 좌절밖에 없는, 불치의 병이 들고 기댈 데 없는 영혼들이었다. 90% 이상이 환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목사님의 말씀 능력이 굉장히 살아났다. 전도사로서 사역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 치유사역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환상의 콤비로 일하게 하셨다.
성도들도 기적을 체험하고 말씀의 은혜를 누리며 영육 간에 건강한 새 삶을 살게 됐다. 그로 인해 기도원에서의 예배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기도원을 찾아온 다른 사람까지 우리 예배에 참석하려 했기 때문이다.
개척 3개월 만에 가나안수양관에서의 시간을 마감했다. 이후 3개월간 부산 시내 여러 장소를 돌면서 예배드렸다. 성도들은 자기 집을 담보로 대출받을 정도로 교회 사랑이 남달랐다. 개척교회임에도 불구하고 2002년 6월 화명동에 991㎡(300평)의 교회부지를 매입하고 예배당 건축에 착수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성도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해 동참했다. 개척과 동시에 예배당 지을 땅도 허락하시고 그 일에 동참할 성도도 허락하신 것이다.
그해 11월 마침내 250석 규모의 조립식 예배당이 완공됐다. 교회설립예배와 입당예배를 첫 주일에 드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세상에, 교회를 개척한다면서 개척과 동시에 자립과 교회건축을 했다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교회설립예배에 참석하신 목사님들과 하객들이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편 목사님과 내게 주신 비전의 시작이었지만 그렇게 대망교회는 처음부터 기적의 교회로 알려졌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면 2부 순서로 안수시간을 가졌다. 교회의 양육체계도 잡아나갔다. 성도들 대부분이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이었지만 젊고 학력도 높았다. 전국 각처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둘이서 감당하기가 벅찰 지경이 됐다.
육적으로 지식수준이 높은 성도들, 영적으로 앙망하는 성도들,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으로 신음하는 성도들…. 부교역자가 절실했다. 영적 체험과 말씀의 능력과 성도들의 건강을 두고 눈물 뿌려 기도할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했기에 기도하는 중 경남 통영 태평성결교회에서 사역하던 시동생 목사님을 청빙했다.
교인들은 100% 환호하며 맞아주었다. 부목사로서 최고였다. 오창호 목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담임목사님인 형님과 똑같은 코스를 밟은 것이다. 기도도 많이 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교회개척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줬고 우리 교회의 시스템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교회를 잠시 비우고 부흥회를 나가도 아무 부담이 없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최고의 부목사였다. 더 큰 복도 주셔서 거제도에서 목회하다 은퇴하신 친정 부모님도 출석하게 됐다.
세 분의 목사님들이 힘을 합쳐 사역하면서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250명을 수용하는 교회당 본당에 자리가 모자라서 주일 예배를 2부로 나누어 드렸다. 안수 방법도 바꿨다. 한 명씩 일일이 다독거려가며 안수해주었던 초기의 시스템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교인들과 의논해 화요치유기도회로 정하고 내가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통성기도와 동시에 안수를 해 주는 시스템으로 바꿨다. 그날은 다른 교회 교인들도 와서 은혜받고 병 고침을 받아 본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교회당 문을 활짝 열어뒀다. 교회의 소문은 더욱 널리 퍼졌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