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파일러’에게 열리는 대출의 문… 금융혁신이냐 독이 든 성배냐

입력 2019-11-19 04:04

카카오뱅크는 지난달 초 ‘신용점수 올리기’ 서비스를 내놨다. 고객 동의를 얻어서 신용평가사에 각종 비금융정보(건강보험, 세금납부 내역 등)를 대신 넘겨줘 신용등급 평가에 활용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이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카카오뱅크가 눈독을 들인 건 ‘신 파일러(Thin filer)’다.

‘서류가 얇은 사람’이라는 뜻의 신 파일러는 금융거래 정보가 거의 없는 이들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최근 2년간 신용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고, 3년간 대출 내역이 없는 이들이다. 20대 청년층이나 60대 이상 고령층이 대부분인데, 신용점수가 상대적으로 낮다. 은행에서 돈 빌리기가 여의치 않은 계층이다.

최근 들어 신 파일러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정부가 신 파일러를 포함하는 이른바 ‘금융 취약계층’을 위한 불이익 해소 방안을 제시하면서부터다. 비금융정보를 활용한 신용 재평가가 대표적이다.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도 조금씩 드리워지고 있다. 신 파일러가 대거 대출시장에 진입하면서 채무불이행(신용불량)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18일 나이스신용평가정보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신용등급을 지닌 우리 국민은 4515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신 파일러는 1107만명(24.5%)으로 추산된다. 국민 4명 중 1명꼴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신용등급(4~6등급)을 받을 확률이 높다. 신용점수 높이기 서비스가 신 파일러에게 높은 인기를 끄는 배경이다.

신용점수 높이기 같은 서비스는 금융 혁신기술을 접목하면서 빛을 발하고 있다. 빅데이터 기술 등을 활용해 통신요금,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도시가스, 수도요금 납부실적 등의 비금융정보들이 신용평가 재료로 쓰인다. 금융위 관계자는 “통신요금 납부실적을 통해 신용재평가를 하면 기존에 대출을 거절당했던 금융 소외계층(7~8등급, 약 71만명) 가운데 20만명 정도는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분석했다.

금융회사들은 발 빠르게 ‘신 파일러 모시기’에 뛰어들었다. 은행권이 통신·유통업계와 손잡고 비금융데이터를 서로 활용하는 식이다.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은 금융이력이 부족한 이들의 신용대출 재평가를 위해 SK텔레콤 등 이동통신 3사 정보를 반영한 신용평가시스템을 구축했다. 우리은행의 ‘우리비상금대출’은 통신사 데이터를 활용한 전용 대출상품이다.

돈 갚을 능력이 있는 신 파일러에게 ‘대출의 길’이 열리면 긍정적 효과가 많다. 금융 형평성이 개선되고, 금융시장도 일정 부분 활력을 얻을 수 있다. 혁신 금융의 성과로도 꼽을 만하다.

그러나 부작용도 우려된다. 채무 변제를 제때 못해 빚어지는 신용불량의 위험성이 부각되고 있다. 한번 빚 구덩이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여간 힘든 게 아니기에 자칫 ‘독이 든 성배’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은행이 2014년부터 2017년 6월까지 신규 채무불이행자 39만7000명의 신용회복 이력을 추적 조사했더니, 신용을 회복한 차주는 전체의 48.7%에 불과했다. 현재 가계부채 상황도 불안하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취약차주의 연체대출 비중은 46.8%로 집계됐다. 2016년(41.0%) 이후 지방의 취약차주를 중심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금융연구원 가계부채연구센터 이순호 연구위원은 “향후 대출시장에 진입하는 신 파일러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이들의 불이익 해소도 확대돼야 하지만 동시에 부채상환에 대한 엄격한 책임의식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정책적 차원에서 채무재조정, 파산제도 등과 관련한 안내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