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규제 완화 전부터 외지인 행렬
대전 지역 묻지마 구입과 비슷한 패턴
“여러 명 몰려다니며 아파트 쇼핑
내지인·젊은층 마음까지 흔들어
“외지인 썰물 땐 지역민 피해볼 것”
“지난해 가을쯤 서울 분들이 울산으로 왔었어요. 쭉 둘러보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그러더라고요.”
17일 울산의 감정평가사 A씨는 지난해부터 외지인 행렬을 목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울산에서도 실수요가 높은 남구의 문수로2차 아이파크 단지를 콕 찍고 온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지역경제 핵심인 조선업 불황 등의 여파로 수년간 이어진 부동산 침체가 계속되던 상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외지인들의 대규모 매집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왔던 ‘서울 분들’ 말처럼 외지인을 실은 전세버스는 올 봄부터 다시 울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1진 외지인들의 ‘호언장담’과 맞아떨어지는 시점이었다. 지역 관계자도 “3개월 전쯤부터 ‘차떼기’라고 하는 현상을 봤다. 왜 버스 대절해서들 와서 한 채씩 사가지고 가는 것 있지 않냐”고 목격담을 말했다.
전세버스 출발지는 어디였을까. 집값 광풍이 불고 있는 대전에서 만난 공인중개사들에게서 일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대전 서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3년 전 쯤부터 버스를 대절한 사람들이 와서 대전을 훑었죠. 대전에서 다 해먹고 울산으로 갔다고 하던데요”라고 귀띔했다. “외지인들이 다음 행선지로 울산을 지목했었다”는 말은 여러 부동산 업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렸다. 전국구로 투자처를 찾아다니는 외지인 세력이 울산을 눈여겨봤었다는 의미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를 피해 전국을 돌며 오를 곳을 선점하는 외지 투자자들의 움직임은 수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이 온 뒤로 울산 아파트 매매가격은 지속 상승했다. 한국감정원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울산 지역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지난 9월 이후 7주 연속 상승세다.
외지인 버스 행렬은 집값 폭등 전주곡
외지인의 타깃은 ‘울산의 강남’으로 불리는 남구였다. 대전으로 몰려든 외지인들이 학군 좋고 교통이 편리한 서구를 찍은 것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특히 옥동에 즐비한 학원가와 가깝고 바로 옆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끼고 있는 신정동 문수로2차 아이파크 아파트를 찾는 발걸음이 심상치 않았다. 신정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올해 5월쯤부터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다 사들이다보니 지금은 물건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외지인 행렬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울산 남구의 아파트 매입자 가운데 외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년 새 껑충 뛰었다. 지난해 5월 6%대이던 외지인 비율은 올해 5월 18%대에 육박할 정도로 올랐다. 지난 8월에는 32.9%까지 급등하기도 했다. A씨는 “부동산 관련 강사들이 찍어줬다는 부동산 목록에 이 아파트 단지가 적혀 있는 걸 봤다. 이 아파트의 실거래를 최근 순으로 10건 찾아봤는데 10건 중 9건이 외지인이더라”고 전했다.
전세버스 탄 외지인은 내지인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울산 지역의 부동산 카페에서는 수개월 전부터 외지인 소문이 돌았다. 특히 해당 아파트에 대해서는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장바구니에 담듯 담아갔다더라” “서울 부동산 강의에서 그동안 저평가됐던 울산을 지목했다더라”는 얘기가 오갔다.
외지인 사재기를 신호탄으로 집값은 뛰었다. 외지인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집주인들도 매물을 내놓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끔 나오는 물건은 외지인이 ‘싹쓸이’하고, 이 과정에서 집값이 뛰었다는 대전 둔산동과 비슷한 양상이다. 지난해 12월 문수로2차 아이파크 아파트 전용면적 84.99㎡ 매물의 매매가는 5억4700만원이었지만 지난달에는 84.94㎡ 매물이 6억3500만원에 거래됐다. 해당 지역 공인중개사는 “물건 자체가 아예 없는 상태라 물건만 나와주면 좀 더 높은 가격에도 사려고 할 것 같다. 이걸 고려하면 1억원 정도 올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산에도 통한 외지인 공식
외지인이 몰리면 값이 급등하는 현상은 수학 공식처럼 적용됐다. 외지인 레이더망에 오른 부산에서도 같은 공식이 적용됐다. 정부가 해운대구 등 부동산 조정대상 지역을 해제하자마자 곳곳에서 전세버스를 탄 외지인 목격담이 쏟아졌다. 부동산업계는 해당 3개구의 규제 완화 가능성을 노리고 미리 대기를 타던 외지인 역시 수두룩했다고 입을 모은다.
부산에서 외지인 행렬의 물꼬를 튼 곳은 남구였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서울 거주자들의 올 1~9월 부산 남구 아파트 매입 건수는 15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8건)과 비교해 4배 이상 늘었다. 서울 외지인들의 ‘부산행’이 이미 몇 달 전 시작됐다는 뜻이다. 이는 부산 남구가 조정대상 지역에서 빠진 시기(지난해 12월)와도 맞물린다.
남구 대연동 대연롯데캐슬레전드 아파트 단지에는 몇 달 전부터 외지인 투자자들이 몰렸다. 부동산 카페에도 아파트 단지를 둘러본 외지인 임장기가 심심찮게 올라왔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추석 전후로 해서 투기꾼들이 투자하러 많이들 왔다”며 “강사가 이 아파트를 찍어줬다더라. 부동산 공부하는 카페들에서 여러 명이 모여서 왔다”고 말했다. 이어 “버스가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파트를 사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도 이미 물건이 없어서 못 사가는 경우도 있었다”며 “급매가 투자금액 대비 수익률이 높은데, 이때부터도 급매 물건이 많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대연롯데캐슬레전드의 전용면적 84.95㎡ 매물은 연초 5억6000만원에 거래됐다. 현재 이 규모 매물 호가는 7억원을 돌파했다. 해당 아파트 인근 공인중개사는 “가격이 두세 달 사이 8000만원 정도는 오른 것 같다”며 “지금은 실수요자가 손도 못 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불은 최근 조정대상 지역에서 해제된 해운대구로 옮겨붙었다. 해운대의 한 공인중개사는 “규제가 풀리기 직전 1주일 전부터 외지인이 많이 왔다. 호가는 규제 풀리고 딱 2주 만에 1억원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이 중개사는 “아파트가 저평가됐을 때 매물을 내놨던 사람이 (규제 해제 후) 계약을 취소한 사례도 가끔 있었다”고 했다. 집값이 계약금과 위약금을 합한 것보다 더 오를 것으로 봤다는 의미다.
해운대구의 다른 공인중개사는 “남구가 올랐으니 해운대구는 더 오를 것이라고 보고 있다”며 “부산은 2년 동안 침체장이라 서로 눈치를 봤었는데 남구 쪽부터 분위기가 불어오니까 (해운대의) 실수요자들도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공인중개사는 “전세 만기가 다 돼서 ‘생각 좀 해보자’고 했던 분들은 지금 막막해진 상태”라며 “진짜 들어가 살아야 되는 실수요자들이 있는데 너무 과열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전염되는 부동산 투자 열풍
외지인이 탄 전세버스는 집값만 올린 게 아니었다. 그들이 등장하고, 매집 현상이 나타나면 부동산시장이 어김없이 들썩거렸던 점을 지켜본 내지인들의 마음도 흔들었다. 내지인은 곧 광풍 행렬에 동참했다. 부산의 경우 남구에서부터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달 초 해운대구가 조정대상 지역에서 해제되자 외지인은 물론 내지인들까지 덩달아 해운대 매수세에 올라타고 있다.
부동산 급등의 학습효과는 내지인을 외지 투자자로 변신하게도 했다. 바이러스가 퍼지듯 부동산 광풍이 지나간 지역을 중심으로 이 같은 현상이 심했다. 실제 대전에서는 인근 지역 투자를 물색하는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대전의 부동산 카페들에는 몇 개월 전부터 충북 청주나 충남 천안 부동산 임장기가 연달아 올라왔다.
이런 패턴으로 오른 집값은 비정상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지방은 인구가 줄고 있는데도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며 “일부 신축 아파트에 대한 쏠림 현상으로만 보기에는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다. 결국 외지인이 빠져나오면 동네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부동산 열풍은 쉽사리 꺼지지 않을 분위기다. 부동산 광풍에 한발 비켜서 있던 젊은세대들에게서도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대전에서 집값 상승을 지켜봤던 공인중개사는 “2년 전 비트코인 광풍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이 없으니 부동산 투자에 올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 겸임교수는 “종잣돈 규모가 작은 청년세대들이 지방을 노리고, 이걸 징검다리 삼아 수도권·서울로 오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자금은 많은데 투자할 곳이 없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지방 경기가 계속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큰데, 그러면 지방의 일부 대도시에만 사람들이 몰려가는 쏠림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임주언 정현수 김판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