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만 해도 해태의 붉은 유니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날 해태의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이라는 난공불락 투수들과 홀로 맞장을 뜬 선수가 바로 삼성의 투수 박충식(49)이었다. 무려 15이닝 181구를 던지는 투혼을 선보였지만 2대 2 무승부로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이 경기 혹사로 박충식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만한 피칭을 한 당시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는 이제 열정 가득한 아마추어 선수들의 지도자로 새출발을 하게 됐다. 은퇴 뒤 프로야구 선수협 사무총장, 호주프로야구 질롱 코리아 단장 등을 거친 박 감독은 지난 8월 창단된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사이버외대)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한 뒤 내년 시즌 준비에 한창이다.
우여곡절 많지만 야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헌신적인 박 감독을 최근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뜻하지 않게 대학야구를 맡게 된 것은 그의 고민과 주위의 관심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야구를 지켜보면서 못내 아쉬운 것은 좋은 선수들이 생각보다 일찍 운동을 그만둔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에 지명되지 못했지만 충분히 기량이 괜찮은 선수들이 많은데 고등학생 때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더라구요. 대학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기량을 폭발시킬수 있는데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차에 김중렬 사이버외대 총장의 연락을 받고 고민하다 감독직을 수락했다.
33번째 대학야구팀이 된 사이버외대 야구부는 경기도 이천 팀업캠퍼스를 훈련장으로 쓰며 내년부터 대학야구리그에 참가할 예정이다. 사이버외대팀의 장점으로 박 감독은 ‘공부할 수 있는 엘리트야구 환경’을 들었다. 그는 “대학 특성상 강의가 원격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의외로 훈련할 시간이 많다”며 “영어, 일어 등을 전공으로 선택해 외국어 공부를 쉽게 할 수 있어 선수로서 뿐 아니라 다양한 진로 탐색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생팀 감독인 만큼 요새 발품을 많이 팔고 있다. 박 감독은 “전국을 오가며 선수, 감독들을 만나고 있다”며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열정있는 선수들을 영입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곧바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리그에 잘 연착륙해 선수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다짐했다.
침체된 대학야구 발전에 대한 고민도 많다. 지난달 고교·대학선수들이 출전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수 아래 중국에 두 차례나 패하고 4위에 머문 것은 한국 대학야구의 현실을 보여줬다. 박 감독이 바라는 것은 ‘얼리드래프트(졸업 이전의 학생도 참가할 수 있는 드래프트)’ 도입이다. 프로농구와 프로배구에서는 시행 중인 제도다. 박 감독은 “현재 대학 2, 3학년 때 잘하다 4학년 때만 잘 못해도 손해가 큰 상황”이라며 “몇 학년 때든 프로에 지명될 수 있다면 본인의 자각도 남다르기에 야구계에서 얼리드래프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프로야구 선수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싸운 스타 박충식은 이제 아마야구로 눈높이를 낮췄지만 한국 야구에 더 크게 기여할 길이라며 기뻐하고 있다. “아마추어 지도자는 처음입니다. 선수들과의 소통을 통해 기량 향상 및 인성 함양을 시키면서 대학야구 부활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이현우 기자 bas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