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영국 런던의 템스강 유람선에선 한국영화 한 편이 상영됐다.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괴물’. 영화에 등장하는 컵라면과 소주를 맛본 런던 시민 200명은 영화 속 괴물이 한강 밖으로 튀어 오르고 강이 일렁일 때마다 낮게 소리를 질렀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색다른 상영회로 화제몰이를 한 주인공은 전혜정(51) 런던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의 광장’ 런던 레스터 스퀘어에서 5년째 영화제를 이끌어온 그는 남다른 기획력으로 한국 문화를 유럽에 알려온 유명인사다. 박찬욱 감독 등 숱한 영화인들이 그의 지인이다. 최근 강릉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찾아 국민일보와 만난 전 위원장은 “엄청난 문화적 인프라를 갖춘 영국은 우리 문화를 전하는 데 안성맞춤인 곳”이라며 “올해 영화제도 한국 작품 대부분이 매진되며 흥행했다”고 전했다.
영국 최대 극장인 오데온 등에서 지난 3일까지 11일간 열린 제4회 영화제에서는 아시아 11개국의 영화 60편이 상영됐다. 1만여명이 다녀갔는데, 배우 류준열 정해인, 홍콩 배우 곽부성 등 스타들에게 큰 관심이 쏠렸다. 전 위원장은 “넷플릭스로 드라마 ‘봄밤’(MBC)을 본 정해인씨의 해외 팬까지 많은 이들이 현장을 찾았다”며 “떠오르는 배우와 감독들의 발판으로 여겨지는 축제라 기쁘다”고 했다.
민간 행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영화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정식 출범 전인 2015년 시범 행사를 시작으로 5년도 안 돼 런던시가 치켜세우는 축제가 됐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영화협회에서 에든버러영화제 등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지원금을 받고 있고, 올해는 서울관광재단에서도 후원을 받았다.
이런 성장에는 전 위원장의 헌신이 있었다. 2006년 런던 한국문화원의 출범 멤버였던 그는 10여년간 일한 퇴직금을 영화제에 쏟아부었다. 문화원 재직 당시 K뮤직페스티벌 등 숱한 문화 전파 모델을 성공시킨 노하우를 자유롭게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비로 출장을 갈 정도로 예산이 빠듯하지만, 영화제를 찾은 스타와 감독들에게 최상의 조건을 제공하려 늘 발품을 판다. 전 위원장은 “바쁘게 돌아다닌 결과 이번 레드 카펫 차량으로 롤스로이스를 후원받았는데, 배우들이 굉장히 놀라더라”며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 영화인들이 문화 전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기획자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의 남다른 기획력도 빼놓을 수 없다. 가령 올해 영화제에서는 ‘차세대 백남준’으로 불리는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아트를 영국 대표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 내 극장에서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전시문화를 즐기는 영국 시민들의 시선을 붙들기 위해서였다.
전 위원장은 벌써 내년 영화제 준비에 들어갔다. 영화제 5곳을 먼저 돌아다닐 예정이다. 그런 그가 꿈꾸는 런던아시아영화제는 ‘미래형 축제’로 정의할 수 있었다.
“전 타임스지 기자가 우리 영화제를 ‘부티크 영화제’라고 하더라고요. 규모는 작아도 개성 있고 알차다는 뜻이죠. 이젠 그걸 넘어 여러 인종과 문화, 예술이 녹아드는 행사를 만들고 싶어요. 이를테면 ‘페스티벌 3.0’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