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새벽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제주국제공항 안으로 한 노인이 들어섰다. 얼굴이 검고 눈은 퀭했다. 그는 익숙한 듯 휠체어를 예약해둔 항공사 데스크로 느린 걸음을 옮겼다. 올해 69세의 김상교씨. 노인층에선 젊은 축이지만, 혈액암 진단을 받고 외래와 입퇴원으로 4년째 서울을 오가다 보니 어느새 늙고 작아졌다. 그는 “아이들이 연차를 내기 어려운 날에는 오늘처럼 혼자 가기도 한다”며 “즐거운 여행객들 사이에서 볼품없는 몸으로 비행기를 타는 게 매번 괴롭고 지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살이를 꿈꾸지만 아프면 좋은 곳이 아니다. 제주에 상급종합병원이 없기 때문이다. 장기간 치료를 필요로 하는 중증환자들은 매번 비행기를 타고 병원을 오가느라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안고 산다.
제주도에 따르면 지난해 도민 13만9610명이 ‘육지 병원’을 찾았다. 이들이 지출한 진료비는 1353억원이나 된다. 2010년 510억원에서 2018년 1353억원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환자와 동행하는 가족들의 항공료·체류비까지 포함한다면 제주 환자들의 진료비 지출 부담은 훨씬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원정 진료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역 환자 이용률이 높은 서울아산병원의 경우 제주지역에서 온 신규 환자 수가 2011년 707명에서 2018년 1317명으로, 입원 연인원은 2011년 7732명에서 2018년 9929명으로 늘었다.
도내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도외 상급종합병원으로 전원하는 경우도 많다. 도민들의 원정 진료가 많은 것은 도내 의료서비스에 대한 불신 때문으로 분석된다. 제주도 공공보건의료지원단이 지난달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4%가 ‘중증질환 의심 시 서울 등 도외병원을 가겠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의료진의 실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54%로 절반을 넘었다.
제주에 상급종합병원이 없는 것도 주된 이유다. 전국의 상급종합병원은 42개다. 그러나 제주는 울산 세종 경북과 더불어 상급종합병원이 없는 지역이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