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나의 ‘19호실’

입력 2019-11-14 00:08

화제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예상대로 영화는 가정 영역에 배치된 지영의 공허한 표정으로 시작했다. 분주하게 집 안 청소를 한 뒤 베란다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지영의 짧은 자유 시간은 곧이어 안쪽에서 들려오는 “엄마~” 소리로 끝이 났다. 사실, 얼마나 아름답고 반가운 소리인가. 내 아이가 눈을 뜨자마자 찾는 나의 이름. 그러나 어찌 그 이름이 내 존재의 전부이랴. 일상 안에 스며들어 있는 여성 배치의 숙제들을 묵묵히 해내던 지영은 결국 병을 얻었다. “복에 겨웠구나!” 제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곁에서 함께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 생활전선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외벌이로 핵가족이 유지되고, 더구나 가능하면 일찍 퇴근해 육아에 참여하려 하는 ‘가정적’인 남편을 둔 지영은 나약하다고 말이다.

지영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니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수잔이 떠올랐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이 소설은 꽤 성공한 남편의 외벌이 노동과 성실한 아내의 주부생활이 이뤄놓은 아름다운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편만큼 배우고 직업적 성취도 어느 정도 맛보았던 수잔이 ‘낭만적인 결혼’의 결과로 네 아이의 엄마가 됐을 때,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일종의 ‘유예’로 간주했다. 막내까지 학교에 보낸 뒤에는 다시 ‘본연의 수잔’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10년이 넘는 전업주부의 시간들을 잘 치러냈다. 하지만 수잔의 위기는 아이들의 부재 상태에서 비로소 누리게 된 집안에서의 자유시간을 경험하면서 왔다. 집안에서 수잔은 결코 자유롭지 않았고 ‘본연의 수잔’을 찾을 수도 없었다.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든 언제나 벌컥 문을 열고 경계를 침범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은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수잔은 주부의 역할이 필요치 않을 시간(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동안 일주일에 세 번 어느 허름한 호텔의 19호실에 칩거했다. 그리고 철저히 자기 자신만 있는, 자기만 열고 닫을 수 있는 그 공간에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공간을 남편에게 들키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을 대면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연실색한다.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에게 해명하는 대신 수잔은 자신만의 19호실을 공개하지 않은 채 결국 그 방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수잔에게 ‘19호실’은 무엇이었을까. 문학비평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을 그 방의 상징적 의미는 ‘자아의 바운더리’이다. 아내라는 이름, 엄마라는 이름, 딸 혹은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벌컥벌컥 침범당하지 않는 나의 경계. 내가 ‘본연의 나’이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절대적 독립과 자유의 공간. 그것이 빼앗길지 모른다는 절박함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수잔의 선택에, 동조는 못 해도 적어도 이해는 갔더랬다. 같은 맥락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한을 담아 순간순간 그녀들이 됐던 지영의 병도 이해는 갔더랬다.

하지만, ‘19호실’을 빼앗긴 사람들이 비단 전업주부만일까. 이 질문을 함으로써 근현대 가부장제의 여성배치가 갖는 부당함을 가리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 문제는 서로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건설적 배치로 재구성돼야 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소설을 떠올리며 내가 묻는 이 질문은 한 인간이 ‘본연의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치명적 경계로서의 ‘19호실’에 대한 물음이다. 실은 남편도, 아이들도, 직장동료도, 목사님도, 성도들도 가져야 하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져야 하는 존재의 경계 말이다. 신앙적 언어로 말한다면 오직 나와 하나님의 사귐만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나의 19호실’이다. 예수께서도 바쁜 공생애 가운데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셨지 않았나. 비로소 내 숨을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본연의 나’를 찾고 만들어가는 시간과 공간, 이 ‘19호실’을 가져야 사람은 나를 잃지 않고서 누군가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