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첫날 노숙신세 모랄레스, 멕시코 망명길 올랐다

입력 2019-11-13 04:05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전 대통령이 ‘개표조작 의혹’으로 사퇴한 10일(현지시간) 어느 건물 바닥에 누운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11일 이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하며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강제로 물러난 뒤 첫날 밤을 맞았다”고 썼다. 그는 이날 밤 멕시코로 망명하며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밝혔다. AFP연합뉴스

선거조작 의혹으로 불명예 퇴진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전 대통령이 멕시코 망명길에 올랐다.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 상·하원 의장까지 물러나면서 정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볼리비아는 조만간 정권 공백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11일 밤(현지시간) 트위터에 “저는 멕시코로 떠난다”며 “형제들의 정부(멕시코)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적 이유로 나라를 떠나는 것이 고통스럽다”면서도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덧붙였다.

멕시코 정부는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멕시코행 비행기 탑승 사실을 확인했다. 앞서 좌파 성향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볼리비아 시위를 쿠데타라 주장하며 망명을 먼저 제안했다.

볼리비아는 정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다. 임시 대통령직은 야당 소속 제닌 아녜스 상원 부의장이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 AFP통신은 아녜스 부의장이 “모든 볼리비아인의 뜻을 반영하는 선거 절차가 있을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개표 조작 정국이 일단락됐지만 혼란이 더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사퇴 발표 이후 지지자 수천명이 시위를 벌였고, 시내 곳곳 상점이 약탈되거나 버스가 불탔다. 모랄레스 지지자와 반모랄레스 시위대가 충돌해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중남미 각국은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사퇴 후 그 여파가 자국에까지 미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권 성향에 따라 그의 사퇴를 ‘쿠데타’로 규정하거나 ‘민주화 시위’로 평가하는 상반된 모습도 나타난다.

AP통신 등은 이날 쿠바와 멕시코,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등 좌파 정권들은 모랄레스 대통령이 불법적 방식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쿠데타라는 용어를 적극 부각시키면서 군부 쿠데타의 희생양이라는 모랄레스 대통령의 주장에 동조했다.

모랄레스 퇴진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은 좌파 정권들이 연대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랄레스의 퇴진을 “민주주의의 의미 있는 순간”이라며 “볼리비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민주주의와 국민의 뜻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고 강조했다. 브라질과 콜롬비아, 페루 등 우파 집권 국가들도 “민심의 저항에 따른 자발적 퇴진”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와 유사한 입장이다.

중남미 지역은 미국의 정치 개입이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은 과거 반미 성향이 강한 좌파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적극 개입했다. 쿠데타로 모랄레스가 축출됐다는 중남미 좌파 진영의 인식은 과거 기억을 환기해 중남미 우파 정권과 미국을 한통속으로 묶고 진영 결집을 유도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모랄레스 퇴진 후 남은 질문은 민주적 의지에 따른 것이었는지 쿠데타였는지 여부”라며 “민주주의가 회복된 것인지 아니면 무너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볼리비아 군부의 대통령 퇴진 요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존 폴가 헤시모비치 미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볼리비아군은 구두로 하야를 요구했다”며 “이를 위협으로 본다면 쿠데타고, 단순 권고로 본다면 쿠데타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민 권중혁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