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면서 홍콩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총탄에 젊은이들이 또 쓰러졌고, 경찰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위대를 들이받았다. 분노한 시위대는 친중국 성향 남성의 몸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시내에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맨손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은 홍콩 사태가 임계점을 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중국 정부가 홍콩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한 뒤 며칠 사이 홍콩 분위기가 전쟁터처럼 변했다. 앞으로 더욱 격한 충돌과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
중국 정부는 홍콩 사태에 대한 직접 개입을 피해 왔지만 지난달 말 19기 공산당 4중전회를 계기로 발톱을 드러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재한 4중전회에서는 “홍콩의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법률제도를 완비하겠다”고 결정했다. 중국 정부는 이후 홍콩에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최대 이벤트인 신중국 건국 70주년 열병식과 시 주석의 권력 강화 무대인 4중전회까지 참아왔지만 이제는 본격 행동개시에 나선다는 신호였다. 시 주석은 지난 5일 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과 상하이에서 전격적으로 만나 “법에 따라 폭력행위를 진압하는 데 절대 흔들림 없어야 한다”며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당시 회동에는 자오커즈 공안부장도 배석해 향후 홍콩 사태를 중국 공안부에서 직접 컨트롤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런 흐름은 덩샤오핑이 홍콩 반환 협상에서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와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은 홍콩인이 다스린다), 고도자치(高度自治) 등 3대 원칙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람 장관의 눈빛도 달라졌다. 람 장관은 한때 “깊이 사과하고 그만두고 싶다”고 자책하기도 했고, 최근까지 교체설도 자주 나왔다. 하지만 4중전회 이후 홍콩 경찰은 시위대에 초강경으로 돌아섰다. 람 장관은 경찰이 시위대 2명에게 총을 쏴 1명을 중태에 빠뜨렸는데도 시위대를 ‘폭도’라고 비난했다.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면서 홍콩 시위대는 더욱 위험한 처지에 몰리게 됐다. 중국은 공산당의 권위나 체제에 대한 도전은 가차 없이 응징해 왔다. 4중전회도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당 중앙의 권위를 옹호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공산당과 시 주석의 절대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는 홍콩인들에게도 해당된다. 홍콩에서 이미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치고 체포됐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할지 모른다. 홍콩인들은 1987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80년대 한국과 지금의 홍콩 상황이 꼭 같지는 않다. 홍콩인들은 홍콩 정부뿐 아니라 배후의 중국 중앙정부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들 수 있다.
다만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선 것은 뒤집어 보면 불안감의 표현일 수 있다. 홍콩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중국 본토의 반감도 커지고 있지만 홍콩 시위가 억눌린 중국인들의 의식을 깨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시 주석 집권 이후 사회 전반의 통제와 검열을 강화해 왔다. 기자들도 ‘시진핑 사상’ 시험을 치러야 한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베이징대 교수들조차 잔뜩 움츠리고 있다. 베이징대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지 오래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대를 연상케 한다. 엄혹한 사회통제는 시 주석의 장기집권 플랜 추진과정에서 반대 목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는 홍콩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중국식 통제를 두려워하던 홍콩인들의 불안감이 ‘송환법’ 추진을 계기로 폭발해 반정부 시위로 확산됐다. 결국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회통제가 홍콩 시위를 촉발시켜 시 주석의 입지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된 셈이다. 중국 정부는 홍콩 사태를 보며 작은 바늘 구멍 하나가 저수지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 같다. 중국은 자국의 국가제도와 통치체계가 서구보다 낫다며 중국 특색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홍콩 사태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중국 체제가 우월하다면 홍콩인들이 왜 중국이 싫다고 5개월간 시위를 하겠나.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