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민중은 절망적으로 배가 고팠다. 흙도 먹었다.
“임금이 황해도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이 모두 흙을 파서 먹는다는 말을 듣고, 지인(知印) 박사분(朴思賁)을 보내어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사분이 회계(回啓)하기를, ‘해주 인민들이 흙을 파서 먹는 자가 무릇 30여 인이나 되었으며, 장연현(長淵縣)에서는 두 사람이 흙을 파서 먹다가 흙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하오나, 그렇게 대단한 기근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남만성 역, 1971)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세종 26년(1444년) 4월 24일자의 기록이다. 흙을 파다가 두 사람이 흙에 깔려 죽었는데, 관리가 “대단한 기근이 아니”라고 토를 달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흙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산(定山) 지방 어느 골짜기에 이상한 흙이 있는데, 토인들이 그 흙을 파다가 음식을 만들되, 쌀가루 한 말에 흙 다섯 되씩을 섞어서 떡을 만든다 한다. 어떤 이가 가져와서 나에게 보이는데, 복령(茯 )처럼 하얗고 매우 진기가 있었다. 씹어 보니, 조금 흙냄새는 났지만 음식을 만들 만한 것이었다.”(한국고전번역원, 김철희 역, 1976)
이익은 이 일에 대해 무덤덤하다. 이어지는 글은 이렇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상고하니, ‘당(唐) 나라 수공(垂拱) 3년에 무위군(武威郡)에서 돌이 변해 밀가루가 되매, 가난한 자들이 가져다 먹었다’ 하고 또, ‘당 나라 정원(貞元) 시대와 송(宋) 나라 원풍(元 ) 시대에도 모두 이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했다. 그리고 ‘고려사’에, ‘신라 무열왕 4년에 북쪽 바위가 무너져 깨져서 쌀이 되었는데, 먹으니 묵은 창고의 쌀과 같았다’ 하였다. 모두 돌이 변한 것들이었다. 돌도 이미 이와 같았으니, 먹을 만한 흙이 있다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게 없다.”
민중이 배고파 흙을 파서 먹는데 이를 “괴이하게 여길 게 없다”고 툭 던진다. 조선의 사대부야 흙을 먹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입 조금 먹어보고 먹을 만한 것이니 알아서들 하라고 눈을 돌리고 있다.
흙을 먹는 일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다. 1922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이다. 이리는 지금의 익산이다.
“흙을 먹는다 하면 얼마나 거짓말 갓지마는 실로 거짓말 갓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전라북도 이리이라는 농촌에서 조선 소작인이 가져온 흙을 보았다. 또 연구의 자료로서 그 한 덩어리를 휴지하여 도라왔다. 손가락으로 따서 보면 빠득빠득하야 맛치 ‘메리겐’ 가루와 갓흔 점토이였다.”
192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에서 흙을 먹는 일에 대해 또 한 번 기사를 쓴다. 이번엔 경기도 양평이다. 당시 경찰은 이 흙을 연구원에게 넘겨 시험을 하게 하였고, 그 결과를 기사로 알리고 있다. 먹으면 안 된다고.
199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에 나는 전국을 돌며 향토음식을 취재하고 있었다. 먹는 흙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찾아내면서 나는 과연 조선 민중의 삶, 더 가까이는 일제강점기 민중의 삶을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회의가 일었다. 당시에 극소수일 수밖에 없는 지배계급의 기록에 의존하여서는 온전한 한반도의 음식문화를 그려내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였고, 전북 장수군 계북면 백암마을에서 먹는 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광복 이후에도 흙떡을 먹었다고 하였다.
“일제시대 석면 광산 자리에서 먹는 흙이 나왔습니다. 땅을 파면 석면과 석면 사이에 흰 흙이 나오는데 찰기가 있어 감자와 쑥을 넣고 쪄서 먹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먹었습니다.”
당시 이 마을 노인들은 하나같이 흙떡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맛이 아니라 뒷간에서 고통을 겪었던 ‘아픈 추억’이었다. 오랜 세월 탓에 광산 자리는 보이지 않았고, 근처 땅을 헤집어보니 석면만 나왔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흙벽이 보기 흉하다고 석회 칠을 하라는 관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워낙 빈궁한 마을이라 석회 살 돈이 부담이 되어 먹는 흙을 파다가 집집이 벽에 발랐다. 그때에 먹는 흙으로 벽을 바른 집이 몇 채 남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황교익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