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박상익] 냄새를 못 맡는 남자들

입력 2019-11-13 04:02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는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뒤 ‘유레카!’라고 외치며 욕조에서 뛰쳐나왔다. 그리스인들이 목욕을 즐겼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로마에서도 목욕이 일상에 뿌리내렸다. 목욕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청결이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별난 풍습도 있었다. 유명한 운동선수나 검투사가 손수 긁어낸 땀, 먼지, 기름 따위를 작은 유리병에 넣어 팬들에게 판매했는데 일부 로마 여인들은 그것을 얼굴 크림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서양의 목욕 습관은 중세 기독교 세계로 넘어가면서 급격히 변한다. 목욕에 대한 반감이 커진다. 기독교도들의 목욕에 대한 반감은 3세기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로마식 목욕이 쾌락주의와 연관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의 목욕에 대한 태도는 11세기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13세기의 고대 프랑스어로 쓰인 ‘장미 이야기’는 청결을 강조한다. “그대의 몸에 한 점의 때도 없게 하라. 손을 씻고 이를 깨끗이 닦고, 손발톱에 단 하나의 검은 점도 그냥 두지 말라.” 서유럽에서 공중목욕탕 시설은 5세기경부터 기능이 마비되거나 수가 현저히 줄었지만, 11세기 이후 십자군 덕분에 다시 등장했다. 유럽에 다시 등장한 목욕탕은 급속도로 퍼졌다. 14세기 런던에는 최소한 18개의 목욕탕이 있었고, 1292년 인구 7만명인 파리에는 26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번지기 시작한 흑사병은 유럽의 목욕 문화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에 불과 4년 동안 유럽인 3명 중 적어도 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문제는 당시의 의학 수준이었다. 당시 의학 지식에 의하면, 흑사병은 감염되기 쉬운 사람들이 해로운 공기를 마시기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었다. 파리대학 의학 교수들은 뜨거운 목욕이 사람의 몸을 축축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주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열과 물이 피부의 구멍을 열면 역병이 온몸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200여년 동안 역병이 창궐할 때마다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죽기 싫으면 부디 목욕탕과 목욕을 피하시오.”

루이 14세(1643∼1715 재위) 시절, 궁정 안의 모든 사람은 태양왕 특유의 구취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정부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 14세의 입내를 자주 불평했고, 자구책으로 자기 몸에 향수를 엄청 뿌려댔다. 그러자 왕은 그녀의 향수 냄새에 진저리를 쳤다. 의사들은 인체의 분비물이 보호막을 형성한다고 주장했고, 왕과 왕비는 가난한 농민과 마찬가지로 자주 목욕을 하지 않았다.

루이 14세가 열심히 펜싱을 하고 춤을 추고 군사훈련에 참가한 뒤 침실에 돌아왔을 때는 땀에 흠뻑 젖은 채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땀을 흘렸어도 씻지 않았다. 대신 옷을 갈아입었다. 루이 14세가 스스로 “깨끗하다”고 말한 근거는 새 옷, 특히 세탁한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루이 14세는 하루 세 차례나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에 유난히 까다롭다는 평을 들었다. 17세기에는 깨끗한 아마포(린넨) 옷을 입는 것이 물로 몸을 씻는 것을 대신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낫고, 안전하고, 한결 믿을 만하고,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인은 예전 사람들의 불결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12세기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말했듯 “모두가 악취를 풍기면 냄새가 나지 않는 법”이다. 검찰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검찰 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하는 검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이 용기 있는 검사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의 후각이 남성보다 예민하다는 게 정설이지만, 부패의 냄새도 여검사들이 더 잘 맡는가보다. 남자 검사들은 왜 냄새를 못 맡게 된 걸까. 성 베르나르두스의 말처럼 ‘모두가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