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부정 선거 논란 끝에 사퇴했다. 2005년 볼리비아 첫 원주민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4년 만이다.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그의 퇴진을 ‘쿠데타’라고 규탄하며 연대에 나섰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10일 오후(현지시간) TV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면서 의회에 사의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토착민이라는 점이 나의 원죄”라며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이번 사태는 그의 권력욕이 빚은 결과로 보인다.
그는 2016년 4선 연임을 위한 개헌을 시도했다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헌법소원을 통해 4선 도전을 강행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한 규정이 위헌이라고 판단하자 그는 지난달 20일 치러진 대선에 출마했고, 40%를 득표해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개표 과정의 부정 정황이 잇따라 나오면서 퇴진 촉구 시위가 잇따랐다.
특히 개표 부정 정황에 대한 감사를 벌인 미주기구(OAS)가 이날 “투·개표에서 다수의 부정과 조작이 발견됐다”고 발표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OAS는 “모랄레스 대통령이 10% 포인트 이상의 격차로 승리하는 것이 통계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서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고 새 선거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OAS 발표 직후 대통령직을 유지한 채 재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발표했지만 경찰에 이어 군까지 사퇴를 요구하자 사임을 전격 결정했다.
그는 볼리비아 산간 원주민 출신으로 목동, 벽돌공장 노동자, 빵 장수 등을 하며 성장했다. 코카콜라와 코카인의 원료인 코카 재배를 시작한 후 이익단체를 이끌며 이름을 알렸고 1997년 의회에 입성했다.
2002년 대선에서 석패했지만 핵심 정치인으로 급부상했고 2005년 대선에서 53.7%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천연가스 시설 국유화 등 좌파 정책을 통해 빈곤 해소에 나선 그는 2009년 대선에서는 64.2%를 얻으며 연임에 성공했다. 2013년에도 61.4%의 지지율을 얻었다.
그가 집권한 후 볼리비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배 이상 올랐고, 중남미에서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물결)가 퇴조하는 와중에도 지지 기반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가스 수출에 의존하던 볼리비아 경제가 악화됐고 부패 혐의까지 불거지면서 지지율도 떨어졌다. 29층짜리 대통령궁을 새로 짓고 자신의 생가에 박물관을 세운 것은 여론을 한층 악화시켰다.
그의 불명예 퇴진으로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에게도 초비상이 걸렸다. 최근 중남미 각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의 사임이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선 당선자 등은 그에 대한 연대를 표시하면서 시위대를 향해 “폭력적인 쿠데타”라고 규탄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멕시코 정부는 모랄레스 대통령과 각료들에게 피난처 제공을 약속하고 나섰다.
반대로 브라질과 콜롬비아, 페루 등 우파 정부는 모랄레스 사임을 환영하면서 볼리비아의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특히 브라질은 볼리비아 정국 혼란과 관련해 이날 OAS의 감시하에 신속하고 투명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OAS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