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로 올라온 관객들, 정치사 속살 낱낱이 목도하다

입력 2019-11-12 04:06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지난 8일부터 3일간 선보인 ‘로마 비극’에서 관객들이 무대에 올라 배우들의 연설을 듣는 모습. 로마사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유명 연출가 이보 반 호브의 대표작이면서 관객들이 극장 안팎과 무대를 자유롭게 누비며 볼 수 있는 이머시브 극이다. 무대에 참여하는 관객들은 자연스레 극 일부를 구성하게 된다. LG아트센터 제공

정치와 연극은 퍽 닮은 점이 있다. 관객을 꼭 필요로 하는 존재이면서도 그들에게 내밀한 속사정만큼은 들켜선 안 된다. 발가벗겨질수록 권위를 잃기 마련이다. 지난 8일부터 3일간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 ‘로마 비극’은 그래서 파격이었다. 이 대담한 정치극은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들여 수천년 정치사의 속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다.

로마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레이너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한데 엮은 무대다. ‘파운틴헤드’(2017) ‘오프닝 나이트’(2012)로 내한했던 벨기에 출신 유명 연출가 이보 반 호브(61)의 대표작. 2007년 초연돼 아비뇽 페스티벌 등 세계를 누빈 작품으로, 한국 공연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관객이 극장 안팎을 자유로이 이동하며 관람하는 이머시브(관객 참여형) 극이다. 길이가 무려 5시간30분에 달하지만, 지루함 느낄 새 없이 흘러간다. 극에는 팍스 로마나 시대 이전 스러져 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긴다. 시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등 당대 권력자들이 제국 건설을 향한 대서사시를 써내려 가는데, 죽고 죽이는 치열한 권력 투쟁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 등에 대한 웬만한 고전보다 많은 의미를 얻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극의 비범함이 유장한 서사 때문만은 아니다. 연출가는 남다른 연출 기법들을 동원해 2000여년 전 역사를 현대의 것으로 바꿔낸다. 가령 배우들은 갑옷 대신 정장을 입고 무대에 선다. 가장 돋보이는 건 무대에 설치된 15개가량의 TV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여기엔 카메라 감독이 배우를 따라다니며 촬영하는 내용이 실시간 중계되는데, 현대 미디어 속 정치와 놀랍도록 닮았다. 장군들의 인터뷰가 긴급 뉴스로 등장하고, 집정관과 호민관 사이의 논쟁이 ‘100분 토론’처럼 담긴다. 때로는 비디오아트인 양 CNN 뉴스나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 등이 모니터를 흐른다. 모두 ‘지금, 이곳’의 이야기임을 환기하는 장치다.

백미는 극이 관객 참여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베테랑 배우 정동환은 “무대 앞뒤에서 배우들과 함께 섞여 극을 보는 게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배우들은 관객과 어깨를 맞대고 연기한다. 무대를 가득 채운 100여명의 관객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거나 무대 위 바에서 산 식음료를 먹으며 공연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울고 웃으며 논쟁을 지켜보는 이들이 곧 수천년간 정치와 동고동락해온 시민들의 은유처럼 보이는데, 정치에 대한 색다른 간접 경험의 장이 되기도 한다. 다만 무대를 오가며 극 3개 분량을 따라가려니 다소 벅찰 때가 있다.

극은 지난 10일 막을 내렸다. 못 봤더라도 계속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현실의 매 순간 비슷한 극이 공연되고 있어서다. 연출가는 연출 노트에서 극의 의의를 이렇게 전했다.

“이 작품은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이 세계의 정치를 반영하고 있다… 관객은 (움직이다가) 역사적 독백이나 정치 살인의 현장을 놓칠 수 있겠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극은 끊임없는 논쟁과 결정의 산물로써, ‘정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