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고난 성격이 민감하고 예민하다. 인상도 후덕한 이웃 아저씨와는 거리가 멀다. 차갑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인간관계도 ‘예’ ‘아니오’가 분명한 편이다. 우물우물하거나 속임수 쓰는 걸 싫어한다. 대신 한번 신임한 사람은 힘든 상황에 부닥쳤을 때 반드시 변호하고 감싸준다.
충신교회도 이런 원칙 안에서 섬겼다. 목회는 내풍과 외풍이 드세다. 그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런 원칙이 필요했다.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목사는 없다. 쓴나물도 먹고 마라의 쓴 물(출 15:23~26)도 마셔야 한다.
실패를 겁내면 성공의 자리에 닿을 수 없다. 바닥까지 실패했을 때 그 주변에 성공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 성공을 교회의 크기로 결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늘 ‘균형 목회’를 염두에 뒀다. 나도 이렇게 목회했고 후배와 제자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했다. 줄타기 묘기는 절묘한 균형감각이 있어야 가능하다. 몸의 균형과 바른 방향성이 고공 줄타기의 성공 요인이다. 목회도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균형에 많은 신경을 쓰신 것 같다. 우뇌와 좌뇌, 두 다리, 두 팔 등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충신교회에 부임했던 1976년 동부이촌동은 개발 광풍이 불던 곳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동네였다. 후암동 골목에 있던 교회도 동부이촌동 초입으로 이전했다. 교회 건축 중 갈등이 발생했고 담임목사님이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가 부임하기 전 이미 두 명의 교역자가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전쟁터에 소대장으로 부임한 셈이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게 균형과 조화였다. 교인 사이의 양극화와 대립을 감싸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새벽기도와 성경공부, 금요철야기도회였다. 10여명으로 시작한 철야기도회가 입소문을 타면서 1000명을 넘어섰다. 당시 철야기도회는 금요일 밤 10시30분에 시작해 이튿날 새벽 5시까지 했다. 성경공부를 통해 지적인 부분을 채워줬다. 철야기도와 새벽기도는 영성을 채우는 자리였다. 이렇게 균형을 맞췄다.
목회자의 신학도 바른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과 교회는 함께 가는 것이다. 교회는 신학을 만들고 신학은 교회를 세운다. 교회는 신학 태동의 산실이며 바른 신학은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출발점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의 분열과 혼란은 모두 신학 싸움 때문이었다. 여과되지 않은 채 서구신학을 직수입한 것도 다툼의 원인이었다.
폐쇄 정책은 발전을 막고 성도를 우민화한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수입하면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렵다. 해외 신학의 무분별한 이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극단의 진보신학이나 보수신학 모두 마찬가지다. 이 또한 균형이 필요하다. 교회와 신학은 소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인들이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에는 걸림돌이 많다. 신앙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목회는 사람이 대상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면해야 한다. 그들을 신앙인으로 양육하고 인도하는 것이 목회다. 그런데 그들이 목회 걸림돌이 될 때도 있다. 목회자가 오만가지 생각에 빠지는 순간이다. 목회자가 균형 감각을 찾아야 하는 때가 바로 이때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나 친절로 포장하며 득실을 따지려는 사람들, 그들을 잘못 다루면 목회 현장이 고통스럽고 소란스러워진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한 교인일 뿐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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