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이달 16일 산티아고에서 개최하려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격 취소하면서 미국, 중국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청와대의 구상에도 차질이 생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을 만나 한반도 현안을 논의하려 했지만 칠레가 자국 내 반정부 시위 사태로 APEC 회의 자체를 취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만날 기회도 사라졌다. 모친상을 마치고 1일 업무에 복귀하는 문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31일 “칠레에서 APEC을 치르기 어렵다고 참가국들에 통보됐다”며 “추후에 어떻게 일정들을 잡아갈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APEC 회의가 칠레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대신 열릴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날 모친 장례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문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APEC 취소 소식을 보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당초 이달 13일 멕시코를 공식 방문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16~17일 APEC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APEC이 취소되면서 멕시코 방문도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는 그동안 APEC에서 한반도 관련 주요국들과의 양자 정상회담을 갖는 일정을 추진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북·미 비핵화 협상, 한·미 방위비 분담금 등 논의가 필요한 현안이 많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유엔총회 때 미국 뉴욕에서 9번째 정상회담을 한 바 있다. 정상회담을 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간 한반도 외교·안보 사정이 엄중해졌다. 지난달 초 어렵사리 재개됐던 북·미 실무협상이 결렬됐고, 아직까지 재개 조짐이 없다. 북한은 최근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김계관 외무성 고문 등 중량급 인사들이 잇따라 나서서 ‘중대한 기로’를 운운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를 전격 지시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미 정상회담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도 필요한 상황이다. 경색이 장기화되고 있는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PEC이 취소되면서 회담 기회를 뒤로 미뤄야 하는 상황이 됐다.
APEC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회담 가능성도 사라졌다. 이번에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작긴 했다. 하지만 두 정상이 얼굴을 마주할 자리는 만들 수 있었는데 이마저 무산된 것이다. 최근 두 정상은 문 대통령의 모친상, 일본에 큰 피해를 준 태풍 ‘하기비스’ 등을 계기로 위로전을 주고받는 등 우호적인 기류가 생겼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는 이달 3~5일 태국에서 열리는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와 12월 한·중·일 정상회의 등 두 차례 남아 있다. 특히 아세안+3 회의는 오는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기한 만료를 앞두고 양 정상이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다자회의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이 조우할 수는 있지만 양국 갈등 현안을 논의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