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조정민] 신권위주의의 토양

입력 2019-11-01 04:01

신을 부정하면 두 갈래 길을 만납니다. 누군가에게 신성을 부여하든지 아니면 자신을 신격화하든지 두 길 중의 한 길을 갑니다. 인간을 지으신 신을 부정하면 결국 인간의 손으로 신을 만들지 않고서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빈자리를 채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격화된 인간일지라도 신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홀로 견디지 못합니다. 너무 크고 너무 넓고 너무 깊은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입니다.

그곳은 원래 인간 존재를 위한 곳이 아닙니다. 피조물과 다른 존재, 빛과 사랑과 생명의 주체가 좌정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쉴 새 없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자 만들어낸 대체품의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문명과 문화의 전 지경에 걸쳐 그 목록이 가득합니다. 사실 그 목록은 가인의 후예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빚어낸 목록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기에 화려하고 매력적인 목록이지만 그를 위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는 언제나 자신과 이웃의 생명입니다. 가인이 빼앗은 것은 아벨의 생명이지만 가인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그 자신의 생명과 그의 모든 후손의 생명입니다.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돈과 권력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언제나 생명입니다. 생명이 부족한 자들의 관심은 어김없이 안전에 초점을 맞춥니다. 나 스스로 나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늘 초미의 관심입니다. 그의 삶은 본질적으로 권력적입니다. 권력의지야말로 생명과 안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욕구입니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권력적 질서는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인간이 한정된 자신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권력투쟁이 천의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국 홉스의 진단처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입니다.

하지만 권력은 삽시간에 권위의 옷을 입습니다. 권력적 질서가 자리잡는 동안 권위주의가 더 빠르게 확산됩니다. 권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는데 권위주의는 그 무엇보다 경제적이고, 권력을 쟁취하는데도 권위주의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입니다. 더구나 개인의 가치를 압도하는 전체주의 사조가 횡행하는 곳에서는 권위주의가 쉽게 독버섯처럼 번집니다. 지난 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권위주의체제의 폐해를 경험했습니다. 온갖 이념들이 권위주의의 탈을 쓰고 인간 존재와 다양한 사회를 근원부터 위협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성의 세기에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참극이었고, 인종과 종족을 멸절시키고자 하는 대량학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 권위주의체제는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영성의 세기로 불리는 21세기에도 권위주의는 신권위주의의 이름으로 망령처럼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의회를 무력화하고, 정치적 분열을 극대화하고, 기존 질서를 통째로 부인하고, 선동적인 언론 정책으로 불만과 불신을 확산합니다. 결과적으로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신권위주의의 도전은 좌우의 문제나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의 문제입니다. 인권을 말하면서 인권을 차별하고,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자유를 압살하고, 기회의 균등을 내세우면서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위선과 가식에 대한 저항의 문제입니다. 출구가 없을까요? 이 시대에도 복음이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신앙인의 결단이 그 질문에 답할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자기부정과 날마다 지고 가는 십자가만이 그 질문에 바르게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신권위주의의 토양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될 것입니다.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