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거룩하게 보냄 받은 교회

입력 2019-10-31 00:03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면벌부 남발에 대항하여 ‘95개 논제’를 내걸었던 날이다. 이 사건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기에, 전 세계 개신교회는 이날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이후 종교개혁은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오늘날 개신교회는 이 소중한 유산을 밑거름 삼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만큼 ‘거룩함’을 추구하던 교회도 없었다. 교황이 면벌부를 남발했던 것도 더 ‘성스러운’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였다. 교황과 사제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존재로 여겨졌다. 성속(聖俗)이 존재론적으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존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거룩 개념은 신약성경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면서 자신들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부정한 사람을 접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의 존재를 분리함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의 눈에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불리며 천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거룩은 차별적인 힘과 우열을 만들어내는 자신들만의 거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룩은 오히려 부정함 속으로 스며들어 변화시키는 거룩이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여인이었다. 이 부정한 여인이 닿는 곳마다 부정해지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을 때, 깨끗함을 입게 되었다. 여인의 부정이 전염되는 대신에, 오히려 예수님의 정결과 거룩이 확산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정한 거룩의 의미와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거룩은 관계적이고 기능적이다.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된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거룩한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으로서 가장 거룩하시다. 또한 거룩은 기능적이다. 거룩은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고 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들 안에 머물러 있는 거룩은 사실상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참된 거룩은 생명의 확산을 가져온다. 분리하는 거룩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리는 거룩이 진정한 거룩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신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7:16~18)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당신을 먼저 거룩하게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책과 부정을 감당하신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 생명의 전달자로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혈루증 앓던 여인과 접촉하신 예수님처럼, 창기와 세리 곧 죄인들과 식사 교제를 나누셨던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생명을 확산시키는 것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 이유다.

따라서 교회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과 접촉하지 않고 우리만의 거룩을 유지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기 위해 거룩하게 하셨다. 교회의 거룩은 부정하고 죄로 물든 세상과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스며들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을 전달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리고 거룩한 생명의 전달은 예수님의 방법, 곧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짊어지신 십자가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진다. 교회가 우리만의 거룩한 성을 쌓는 일에 분주한지, 아니면 세상의 죄와 부정을 우리 각자의 십자가에 짊어지면서 예수님과 함께 거룩과 생명을 확산시키고 있는지 돌아보는 종교개혁기념일이 되길 소원한다.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