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출판기념회가 본격적으로 줄을 잇기 시작했다. 정치인이 작가로 변하는 것은 대개 선거를 앞두고서다. 출판기념회는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철학을 대중에게 알릴 기회이자 선거자금을 모을 수 있는 장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열리는 출판기념회를 두고 건전한 후원금 모집 활동이라는 평가와 피감기관 ‘삥뜯기’용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연말연초 출판기념회 러시
총선에 나오려는 정치인이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2개월 남짓이다. 공직선거법상 총선 출마 예정자는 선거일 90일 전(내년 1월 16일)부터 선거일(4월 15일)까지 출판기념회를 열 수 없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6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따라서 남은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출판기념회 행렬이 이어질 전망이다.
경기도 광주을이 지역구인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28일 국회에서 저서 ‘사람을 담다, 광주를 담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27일에는 이정미 정의당 의원(비례대표)이 출마 예정지인 인천 연수구에서 ‘정치의 의무’ 북콘서트를 개최했다. 심상정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26일에는 부산 북구·강서구갑을 지역구로 둔 전재수 민주당 의원이 부산과학기술대에서 ‘따뜻한, 숨’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국회의원태권도연맹 총재인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비례대표)은 같은 날 국회에서 ‘국기태권도’ 북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의원은 출마를 준비하는 용인갑 지역에 있는 용인대에서도 같은 행사를 열 예정이다.
지난 9월에는 김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에 있는 경남과학기술대에서 ‘정당의 민주화’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민주당 민병두, 정의당 추혜선 의원 등의 출판기념회도 연말까지 줄줄이 대기 중이다. 지난 4월 민주당에 입당해 성남 중원 출마를 준비 중인 윤영찬 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도 연말에 출판기념회를 열 계획이다.
얼굴 알리고 후원금 모으는 기회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시민들과의 만남의 장이기도 하지만 법망을 피한 정치자금 모금 행사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출판기념회에서 책값 명목으로 내는 금품은 정치자금에 해당되지 않아 신고 의무가 없다.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책값을 받더라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1일 “후원자들이 돈봉투를 넣고 책을 알아서 가져가는 구조”라며 “한 사람당 평균 10만원씩 책값을 낸다. 1000명이 책을 사면 ‘깜깜이 정치자금’ 1억원이 모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감기관에서는 해당 국회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의 출판기념회 소식을 들으면 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감사권을 가진 의원의 출판기념회 초청장은 피감기관에는 ‘현금청구서’나 다름없다. 박상병 인하대 초빙교수는 “상임위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하면 해당 부처 공무원들이 어떻게 참석을 안 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의원의 출판기념회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논란이 됐다. 2015년 10월에는 당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장이던 노영민 민주당 의원이 자신의 시집을 산자위 소관 기관 인사들에게 판매해 비판을 받았다. 2014년 8월에는 박상은 새누리당 의원과 신학용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받은 출판기념회 수익금이 불법 로비자금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이 신 의원의 대여금고와 박 의원의 장남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뭉칫돈이 나왔는데, 두 의원 모두 이 돈을 ‘출판기념회 수익금’이라고 해명했다. 그해 10월 중앙선관위는 국회의원이 출판기념회를 통해 금품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현장에서 저서를 정가 판매하는 것만 허용하며, 사전에 출판기념회를 신고하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 의견을 냈지만 아직 법제화되지 못했다.
출판기념회 투명화 법안은 계류 중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 나오지만 출판기념회 투명화를 규정한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은 적은 없다. 지난해 8월 정종섭 한국당 의원이 출판기념회 회계 투명화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계류 중이다. 이 법안에는 출판기념회 사전 신고, 도서 정가 판매, 수입 내역 신고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19대 국회 때도 출판기념회 개선을 위한 법안들이 있었지만 다 무산됐다. 2014년 11월 당시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에서 금전을 받는 출판기념회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상임위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그해 2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125명도 출판기념회 회계를 투명하게 한다는 내용이 담긴 ‘국회의원윤리실천특별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이 법안 역시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의원 출판기념회가 논란이 될 때마다 관련 법안은 우후죽순 발의되지만, 이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을 보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상병 교수는 “의원들이 스스로 자기 발목을 잡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며 “아무리 시민사회에서 지적해도 반복되는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역 의원의 출판기념회를 아예 금지해야 한다. 현역 의원은 정치 후원금 제도가 있는 만큼 당당한 의정 활동을 통해서 얼굴을 알려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만 책을 내고도 출판기념회를 열지 않거나 후원금을 받지 않는 등 정치인 스스로 조심하는 모습도 보인다. 김병준 전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9월 ‘아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이라는 저서를 출간했지만, 총선용이라는 비판을 피하고자 출판기념회를 열지 않았다. 출판기념회를 열어도 현금봉투와 화환 등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서점이나 출판사에서 직접 출판기념회에 와서 책값만 받고 카드 결제를 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고 전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