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무너지는 디지털 통상… ‘개방’ ‘폐쇄’ 기로에 선 한국

입력 2019-11-02 04:03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상품뿐 아니라 정보와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거래되고 있다. 디지털 통상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에 따르면 2014년 국경을 넘은 데이터 이동량은 초당 211.3기가바이트(GB)로 초당 4.7GB 수준이던 2005년보다 45배 증가했다. 맥킨지는 2021년 데이터 이동량이 2014년과 비교해 9배 늘어날 것으로 추산한다. ‘데이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原油)’라는 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달리는 미국·일본, 지키는 중국

상품 무역과 달리 데이터 이동 같은 디지털 무역에 대한 국제적 통상 규범은 아직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디지털 통상의 핵심 쟁점은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을 허용하느냐다. 각국은 자국민 개인정보 보호, 국가안보 등 다양한 이유로 데이터 거래를 규제하고 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인 구글은 2016년 구글맵 제작에 필요하다며 한국 정부에 지도 데이터의 반출을 요청했다. 한국 밖에 있는 서버로 지도 데이터를 가져가겠다고 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디지털 통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다룰지를 정의하는 글로벌 규범이 존재하지 않지만, 미국과 일본은 선제적으로 움직인다. 두 나라는 각자 주도하는 미국·캐나다·멕시코협정(USMCA)이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국경 간 데이터 이전 자유화, 서버 등 설비의 현지화 금지, 소스코드 공개 금지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디지털 비즈니스’ 자유화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통상 규범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난 9월에는 미·일 무역협정을 맺으면서 이런 내용을 담은 ‘디지털 무역 규범’도 만들었다.

이와 달리 중국은 미국이 요구하는 데이터 개방에 반대한다. ‘데이터 현지화(로컬라이제이션)’를 주장하고 있다. 한 무역 전문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은 굳이 다른 국가와 데이터 거래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충분한 ‘데이터 풀’을 구축할 수 있다고 판단해 데이터 개방에 소극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에서 지난 5월부터 디지털 통상 규범을 마련하기 위한 ‘전자상거래 협상’을 시작했지만, 미국과 중국의 입장 차이 등으로 아직 합의안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서 주장하는 서버 현지화 금지, 소스코드 공개 금지 등에 모두 반대한다. 유럽연합(EU) 역시 미국의 ‘국경 간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 주장에는 찬성하면서도 개인정보 보호 범위를 두고 이견을 노출하고 있다. 미국은 개인정보 관련 우려의 경우 발생한 위험에 대한 최소한 조치만 허용하자는 입장이다. EU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기본권으로 규정하며 개인정보 보호를 강조한다.

다가오는 ‘디지털 통상’ 파고

디지털 통상은 한국에도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국의 전자상거래 시장 규모는 1조 달러에 이른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시장이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두고 ‘통상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 한국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어느 한쪽에 서라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디지털 통상’의 파고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통상 당국 고위 관계자는 1일 “내년 상반기까지 WTO 다자간 전자상거래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미국이나 일본이 디지털 통상과 관련해 양자협의를 제안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마냥 디지털 통상을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1월 국내 기업 1000곳을 대상으로 데이터 개방에 따른 준비상황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공청회도 가졌다. 정부 내부적으로는 우수한 정보통신기술(ICT) 기반과 한류 콘텐츠경쟁력 등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데이터 자유화’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정부는 지난 5월부터 진행된 WTO 전자상거래 협상에 이종석 산업통상자원부 디지털경제통상과장을 수석대표로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직원 등으로 구성된 정부대표단을 보냈다. 한국 대표단은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공정 경쟁을 강조하면서도 일반적 전자상거래의 통관 절차 간소화 등 자유화 원칙을 주장해 왔다.

또한 정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국과 ‘글로벌 마이데이터 사업’을 공동 추진하고 있다. 금융·보건 분야 등에서 나오는 개인정보를 특정기관이 위탁 관리해 개인정보 보호, 데이터 활용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이미 APEC에서 신규 사업으로 예산 8만 달러를 받았다. 호주 등 공동 후원국도 확보했다.

그러나 데이터 개방과 관련해 여전히 국내 법제화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데이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라고 하지만 국내에서 데이터에 대한 정책적 접근은 개인정보, 프라이버시 보호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 왔다”고 전했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한국에서 개인정보가 담긴 데이터를 해외로 보내려면 반드시 개인 동의가 필요하다. 특히 금융·의료 등 민감한 데이터는 해외 거래 자체를 제한하고 있다.

IT·금융 업계를 중심으로 데이터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목소리가 잇따르자 정부와 여당은 지난해 11월 익명 정보에 기반한 데이터는 개인 동의 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데이터 3법(신용정보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이 법안은 1년 가까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