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정시든 수시든… 어차피 웃는 건 학원들

입력 2019-10-28 18:32

“학부모 문의가 너무 많아서 줄서기 아르바이트를 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유명 국어학원 등록을 앞두고 줄서기 대행 업계에선 ‘또 대목이 왔다’는 말이 돈다. 예비 고1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반 등록 기간은 7일이지만 그동안은 매번 예외 없이 당일에 마감돼 왔다. 현장 등록만 받기 때문에 전날부터 밤샘 줄서기를 해야만 수업 등록을 할 수 있다. 등록 전날 저녁부터 학원 건물 앞에는 돗자리부터 낚시의자까지 펴고 밤샘 대기를 하는 사람들이 일렬로 자리를 맡는다.

대치동 줄서기 아르바이트를 전문으로 하는 A씨는 28일 “업체 인력보다 학부모 문의가 많아 그날 일정이 가능한 사람을 섭외해봐야 한다. 시간당 1만5000원을 받는데, 몇 시부터 줄을 서는지는 (계약 전까진) 비밀”이라고 했다. 지난번 여름 특강을 예로 들며 ‘전날 저녁 7시부터 줄을 서면 등록이 가능하냐’고 묻자 A씨는 “계속 인원이 늘어나 대기 시작 시간도 점점 더 당겨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원의 등록 기간 줄서기 풍경은 2018학년도 수능 영어 절대평가가 시작되면서 강화됐다. 변별력을 위해 국어 영역에서 ‘킬러 문항’ 등이 출제돼 중요성이 높아지자 관련 명문 학원으로 수험생들이 몰려든 것이다. 최근 수년간 수능 대비 국어반을 운영하는 전문 학원 상당수가 이 같은 특수를 누렸다. 최근의 한 입시설명회에서는 강사가 “국어가 요새 굉장히 어렵다. 제가 문제를 풀어봐도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더라”며 “그래서 구조적으로 문제를 읽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트레이닝과 누군가의 코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치동 학원가의 ‘줄서기’ 열풍은 교육정책이 어떻게 흘러가도 사교육 시장은 웃는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역대 정부는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입시제도를 손질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정책은 실패했다. 입시 제도를 손볼 때마다 사교육은 변경된 제도에 대응하는 생존전략을 내놨고, 잦은 입시제도 변경 탓에 혼란을 겪은 학부모들은 불안감을 털어내려 학원가로 달려갔다.

최근 10년간(2009년~현재) 사교육 시장 규모는 각 정부의 주요 입시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확산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분석됐다. 정시나 학생부종합전형, 학생부교과전형 등 새로운 제도가 발표되거나 비율이 조정될 때마다 그에 대응하는 사교육 시장이 인기를 누리는 형태다.

입학사정관제 확대를 줄곧 강조해 온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한 해에만 공개석상에서 입학사정관제 관련 발언을 6회나 내놨다. 같은 해 7월 “임기 말쯤 아마 상당한 대학들이 거의 100% 가까운 입시사정을 하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도 했다. 발언 당시 입학사정관제 선발 인원은 전체 정원의 6%에 불과했었다.


교육 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비교과 영역이 대입 필수 요소로 인식되면서 소위 ‘스펙쌓기’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서울 강남 등 유명 사교육 업계를 중심으로 연 600만원 규모의 고액 컨설팅 업체가 성행했다. 내신 부담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어긋났다. 내신 등을 준비하는 입시검정·보습학원은 2009년 3만4568개에서 2012년 3만8360개로 3792개 늘었다. 내신은 내신대로, 비교과 영역은 그 영역대로 중요성이 강조돼 같은 기간 1인당 사교육비(고등학교)는 월 평균 21만7000원에서 22만4000원으로 오히려 커졌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2013년 교육 정책 주요 이슈는 ‘내신 강화’였다. 기존 입학사정관제도는 2013년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외부 실적 대신 학교 활동을 통해 학생부를 평가토록 했다. 사교육 시장은 또 대응했다. 특히 이 기간 특정 학교별 맞춤 내신학원이 크게 증가했다. 과거 학습 수준에 따라 공교육을 보완하던 수준의 내신 학원들은 이때부터 인근 학교별 전문반을 운영하면서 문제풀이만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모집했다. 20년 동안 송파구에서 영어 내신학원을 운영했다는 B씨는 “내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학교 이름을 내세워 반을 운영하게 됐다. 수시 비율이 높아지면서 당연히 학원들이 따라 움직인 결과”라고 말했다. 인근 고교 6개 학교반을 운영하는 국어학원 원장 C씨는 “시험기간에는 학부모들이 원하기 때문에 학교별 내신 대비반을 운영한다. 지정 교과서를 분석하고 학교별 서술형 문제 비율이나 난도 등을 분석해 가르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지난해 수능부터 도입된 영어 절대평가가 변수가 됐다. 대치동 국어학원들이 몸값을 높인 것도 이 즈음이다. 국어 영역이 수능 승부처가 되면서 어렵다고 꼽히는 비문학이나 문법 영역에 대한 학습 수요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지난해 통계청과 실시한 ‘2018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보면 국어 사교육비 총액은 1조4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2% 증가했다. 영어(4.6%), 수학(2.9%) 증가폭의 3~4배다.

사교육 시장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정시나 수시 한쪽에 ‘올인’할 수 없는 부모들의 불안함은 사교육 지출 파이를 키웠다. 일례로 올해(현 중3)부터는 소논문도 대입에 사용할 수 없도록 지난해 새롭게 방침을 내놨지만 이미 대치동·목동 학원가들은 “심화학습이나 조사, 비평, 탐구, 실험 등으로 학생부나 자기소개서에 담아낼 수 있다”며 우회 기재 방법을 안내하는 내용의 프로그램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정시 확대 방침이 발표된 이후 겨울방학 동안 하루 종일 학원에서 수업과 자습을 반복하며 공부하는 ‘윈터스쿨’의 문의도 늘었다고 한다. 한 입시학원 전문가는 “윈터스쿨 문의가 전체적으로 20~30% 늘었다”고 말했다. 윈터스쿨을 운영하는 또 다른 학원 관계자는 “정시 확대 방침이 나오자 구체적으로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학부모들의 문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입시정책이 바뀌고 혼란스러울수록 아이가 공부를 잘 해야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학습량을 고수한다는 것이 대치동 엄마들의 분위기”라고 말했다.

김유나 김판 정현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