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답이 ‘공정’이면 곤란하다. 공정은 어떤 인재를 기르겠다는 교육철학을 실현하는 과정 속의 원칙일 뿐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한 포럼 축사에서 “새로운 미래를 위해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재 양성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지시한 ‘서울 주요 대학 정시 비중 확대’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재 양성을 위한 것인가.
‘조국 사태’에서 다수 국민이 분노한 것은 제도의 불공정이 아니었다.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어온 진보 지식인 개인과 가족에 대한 분노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은 10여년 전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힘든 기발한 방법으로 입시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대학교수란 지위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자녀를 논문 저자로 만들고 인턴 증명서를 획득했다. 제도에 허점이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지나치게 영리하고 수완 좋은 기득권층의 행태에 더 화가 났다.
조 전 장관 가족이 교묘하게 활용한 제도의 허점은 그동안 지속적인 조정을 거쳤다. 이제는 논문 저자가 돼도 이를 입시에서 제출할 수 없다. 학교 밖 수상 이력이나 인턴 활동, 해외 봉사활동도 입시 서류에 적지 못하게 돼 있다. 적어도 조국 사태에서 나타난 제도의 허점은 사라졌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전히 제도가 문제라며 변화를 지시했다. 이로 인해 조 전 장관 가족의 행위는 마치 불공정한 입시 제도하에서 누구라도 하게 되는 일인 것처럼 돼 버렸다.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이 완벽하게 공정한 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입 제도는 오랜 혼란을 거친 결과물이다. 단 하루, 한 차례 시험으로 대입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폐해를 줄이자는 차원에서 도입된 게 입학사정관제이고 학생부 전형이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으니 학교 시험 성적과 교내 활동 비중을 높이자고 해서 도입된 게 수시 전형이다. 이런 제도들이 도입된 뒤 그동안 시빗거리는 있었으나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도대체 왜 현시점에서 정시 확대가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개인 적성을 존중하는 다양한 전형을 하는 게 공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학부모들은 점수로 따지는 수능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존중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기준”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매우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국민의 요구 가운데 후자를 택했다는 말에는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해줌으로써 지지를 잃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게 읽힌다. 옳다고 생각하면 국민의 반대도 설득해야 하는 게 지도자의 역할 아닌가. 대통령의 말은 나중에 정책이 실패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때 생각이 달랐지만 국민의 뜻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변명이 가능하다. 사실 수능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절대다수인지도 잘 모르겠다.
정시 비중 확대는 과거로의 회귀다. 데자뷔처럼 예전의 부작용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밤에 학원 강의를 듣고 낮에 교실에서 자는 학생이 많아질 것이다. 수능을 겨냥한 사교육이 더욱 활개를 칠 것이 분명하다. 사교육 시장은 변화와 불안을 이용한 마케팅에 숙련된 노하우를 갖고 있다. 고소득층 자녀의 명문대 진학이 더 늘 것이고 이는 다시 대입 제도의 공정성 논란을 불러올 것이다.
문 대통령이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정시 확대 지시를 구체화한 25일은 우리나라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날이다. 무역 분야에서 한국은 이제 선진국으로 분류되지만 교육 분야에선 선진국이라는 칭호가 민망하다. 선진국 가운데 입시 제도가 이렇게 자주 바뀌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이 혼란스럽고 답답한 광경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권기석 사회부 차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