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관세·방위비 협상 지렛대 활용 ‘포석’… 농민 반발은 부담

입력 2019-10-25 04:03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두고 막판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내부적으로는 미국과의 통상 마찰을 무릅쓰면서까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농민단체 반발이 부담이다. 국민일보는 24일 정부 관계자들과 통상 전문가들 발언을 종합해 한국의 개도국 지위 포기에 따른 ‘S·W·O·T(강점·약점·기회·위기)’를 짚어봤다.

① 강점(Strength)

정부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농업을 비롯해 상품 교역에 있어 당장 변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은 이미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때부터 개도국 지위를 선언하면서도 농업 외 분야에선 선진국이 짊어지는 의무를 부담해 왔다. 농업 분야 역시 WTO 협상 특성상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해도 다음 협상 때까지 관세와 보조금에 변화는 없다. 때문에 당장은 타격이 없다. WTO의 농업 분야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2015년 이후 교착 상태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진 부분도 고려 대상이다.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 고소득 국가’ ‘세계 상품교역의 0.5% 이상 차지 국가’라는 4가지 요건 가운데 하나만 해당돼도 개도국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은 4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유일한 국가다.

② 약점(Weakness)

장기적으로 한국 농업의 취약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농업 협상이 재개돼 농산물 시장 개방이 확대되면 취약한 한국 농업이 버티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는 식량주권과도 연결된다. 그동안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활용해 쌀 등에 대해 높은 관세를 유지했기 때문에 쌀과 서류(고구마·감자류)는 95% 수준의 높은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콩이나 옥수수 등은 본격적 시장 개방으로 자급률이 7.0%, 0.8% 수준으로 떨어졌다.

쌀 소비가 줄면서 매년 과잉공급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도 걱정을 던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9년 이후 지난 30년간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연평균 2.3% 감소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값싼 쌀까지 수입된다면 국내 쌀 농가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차후 진행될 DDA 협상에서 농업 선진국이 어떤 상황에 놓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안전장치인 개도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다.

③ 기회(Opportunity)

이런 우려에도 정부가 개도국 지위 포기에 무게를 두는 건 자동차 관세 협상, 방위비 협상 등 미국과의 다른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USTR) 고위 관계자를 만나 한국산 자동차에는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을 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효영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 등 달라진 통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새로운 협상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통상 당국 고위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개도국 지위 문제를 거론한 것은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며 “개도국 지위 유지로 미국의 표적이 돼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다”고 말했다.

④ 위협(Threat)

정부가 농민들을 달랠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면 반발이 거세질 수 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UR 협상 체결 때부터 제조업 수익 극대화를 위해 농업을 희생해 왔다는 인식이 한국 농업계에 수십년째 이어져 왔다. 정부가 농민 반발을 달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바로 내년 4월에 총선이 있다는 점도 정부와 여당에 ‘정치적 부담’을 준다. 더불어민주당 서삼석 의원은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한국 농업의 붕괴”라고 주장했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