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22일 열린 나루히토 일왕 즉위 선포 의식은 제20호 태풍 ‘너구리’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뤄졌다. 제19호 태풍 ‘하기비스’의 피해가 아직 수습조차 되지 않은 것을 의식해 오후 3시로 예정됐던 퍼레이드는 일찌감치 취소됐지만 이날 비 때문에 오전 왕궁에서 치러진 의식도 축소됐다고 지지통신 등이 전했다.
일왕은 오후 1시 국내외 사절단을 대상으로 한 즉위 선포 의식 ‘즉위례 정전의 의식’에 앞서 오전에 왕족들과 함께 조상신을 모신 신사에서 즉위를 고했다. 드레스 차림의 왕족들은 비 때문에 검은 우산을 든 채 입장해야 했다. 당초 왕실 관계자들은 뜰에 서 있을 예정이었지만 비 때문에 인원을 줄여 회랑에 대기했다. 게다가 강풍 때문에 왕궁 뜰에 세워놓은 깃발과 휘장이 잇따라 쓰러져 궁내청 직원들이 계속 넘어진 것들을 세우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일본 정부가 일왕 즉위 선포 의식일을 임시휴일로 정한 데다 태풍 때문에 도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왕궁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지난 5월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할 때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었다.
일본 정부가 이날 즉위 선포 의식에 사용한 비용은 약 160억엔(약 1725억원) 수준으로 보도됐다. 30년 만에 열리는 국가적 행사에 140여개국 정상급 인사를 초대하는 행사라는 점을 감안해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1990년 전 일왕인 아키히토(明仁) 상왕의 즉위 선포 의식 행사에 썼던 비용과 비교하면 30% 정도 증가했다. NHK는 “정부가 행사 간소화를 추진해 11억엔가량을 절감했다”면서도 “소비세율 인상과 물가·인건비 상승, 초대국 확대 등이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세부 항목을 살펴보면 외국 귀빈 체류 관련 비용이 50억엔으로 가장 많았다. 일본 정부는 외국 귀빈들 숙소로 도쿄시내 호텔 약 20곳을 예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각국 대표들에 대해 총 3명분(부부 동반 기준, 수행원 1명 포함)의 숙박비와 현지 이동용 차량 1대 등을 부담했다. 그러나 일본을 오가는 항공료와 수행원 1명 외 추가 인원의 숙박비 등은 각국이 부담해야 한다. 주요 외빈에게 특별 제공된 스위트룸은 1박에 200만엔(약 2200만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경찰은 하루종일 최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마이니치신문은 도쿄경시청이 다른 지자체에서 특별 파견받은 5500명을 포함해 2만6000명을 동원해 경비에 나섰다고 전했다. 경시청이 특별 파견 부대를 배치한 것은 아키히토 상왕의 1993년 성혼식 이후 26년 만이다. 왕궁이나 관련 시설, 주요 정상급 인사가 머무는 호텔 인근에서는 차량 검문 등이 강화됐다. 드론 격추 부대와 테러 대응팀도 대비 상태를 유지했다.
1990년 아키히토 상왕 즉위 의식일에는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5만명이 도쿄 도심에서 시위를 했으며, 왕궁에 박격포탄이 발사되는 등 도쿄에서만 34건의 테러가 일어났다. 당시 테러 배후로 지목됐던 정치단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전국위원회’는 2015년을 마지막으로 테러 활동을 벌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날 오전 6시쯤 왕궁이 있는 지요다구 소재 터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경시청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다. NHK는 터널을 주행하던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펑크나 연기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도쿄에선 대규모 교통 통제가 이날 오전 10시쯤부터 밤 12시까지 계속됐다. 23일에도 낮 12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교통이 통제된다. 전일본공수(ANA)와 일본항공(JAL)은 지난 21일 주요 인사들의 귀국을 배려해 총 36편의 ‘계획 결항’을 실시했으며, 24일에도 같은 규모로 실시한다.
한편 일본 정부는 즉위 선포 의식을 계기로 약 55만명에 대한 사면을 시행했다. 일본에서 국가 경조사 시 실시되는 복권·사면은 현 나루히토 일왕과 마사코 왕비가 결혼했던 1993년 이후 26년 만이다. 아키히토 상왕이 즉위했던 1990년 약 250만명이 사면·복권된 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크게 줄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자 430여명이 포함돼 논란이 이는 등 일본 내 여론은 좋지 않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