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부산 금곡고 과학실은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방과 후가 더 시끌벅적했다. 40여 명의 학생이 옹기종기 모여 스크린을 주시했다. 응원팀이 수세에 몰리자 “질질 끌지 말고 위로 패스했어야지” “제라드는 언제 투입할 거야” 등 훈수가 나왔다. 단체로 축구관람을 하는가 싶었지만 스크린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컴퓨터 그래픽이다. 푸른 그라운드를 게임 캐릭터가 누비고 있다. 실제 프로축구 응원전을 방불케 하는 이곳은 게임대회 ‘고등피파’ 촬영현장이다.
고등피파는 아프리카TV와 게임사 넥슨이 공동진행하는 고등학교 게임대항전이다. 전국 고등학교 대표들이 넥슨의 온라인 축구게임 ‘피파온라인4’로 실력을 겨루는 방식이다. 이날은 금곡고와 경남 진주 대아고가 맞대결을 펼쳤다.
앞서 강원 철원 김화고와 경기 평택 동일공고를 연달아 무찌른 대아고 학생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이들의 3연승을 저지하기 위해 금곡고에서는 정승우, 정호영, 정창용 군 등 1학년 3명이 대표로 나섰다. 3반 급우 정승우, 정호영 군이 세 번째 팀원을 찾다가 9반 정창용 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날 두 학교는 총 3판 대결을 펼쳤다. 대아고가 3대0(3-0, 2-0, 2-0)으로 이겼다. 싸늘한 적막이 금곡고 과학실을 엄습했다. 세 번째 경기를 완패한 정승우 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친구들의 박수 세례도 그들의 침울한 표정을 풀어주지 못했다.
금곡고 대표들은 프로게이머 또는 프로게이머 지망생이 아니다. 방과 후 야자실을 찾는 평범한 학생들이다. 정승우 학생은 의공학자를 꿈꾼다. 다른 둘은 아직 진로를 탐색 중이다. 게임은 하굣길에 종종 PC방을 찾아 즐기는 수준이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고등피파 관련 정보를 접해 지원서를 작성했다.
선후배들의 응원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일까. 패배의 여파도 컸다. 학생들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정군은 “친구들한테 이기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면목이 없다. 선생님들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아프리카TV 김용훈 PD는 전국의 고등학교를 방문하며 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김 PD는 “과거처럼 단순하게 ‘게임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요즘에는 거의 없더라. 학생들이 스스로 도전하고,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을 존중해주신다. 초점이 게임에 있지 않다”며 “반드시 상대 학교를 이기라며 피자를 쏘는 선생님도 봤다.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부산=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