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어머니’ ‘전율할 노파’.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두고 하는 얘기다. ‘전율할 노파’라니…. 당연히 일본군과 순사들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다. 경북 영양 출신으로 의병의 아내로 살던 남자현은 유복자 김성삼을 데리고 20대 중반 만주로 탈출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며 항일무력투쟁을 펼친다. 이 전율할 노파는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해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린다.
남자현은 1924년 채찬, 이청산 등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에 나섰다. 영화 ‘암살’의 전사 안윤옥(전지현 분)이 남자현을 모티브로 했다.
1933년 8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 보도. ‘무토 노부요시 대장 암살범 남자현 별세, 단식으로 극도로 쇠약한 결과’. 남자현은 33년 2월 주만주 일본대사 무토를 처단하기 위해 나섰다가 하얼빈 중심가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하얼빈 감옥에서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갔고 단식 9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 병보석으로 출소한 후 사망한다.
조선중앙일보 그해 10월 18일 자 사진기사 형식의 보도. ‘고 남자현묘 입석식이 10월 12일 오후 4시 하얼빈 외국인 공동묘지에서 있었다’는 내용이다. 석관묘와 2m 못 미치는 묘비 사진이 실렸다. 묘비 맨 위에 선명한 십자가. 그는 죽어 독립을 지켜봤을 것이다.
환갑 노파, 일 대사 처단 나서다
지난 15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남자현 지사 생가지는 여느 한적한 농촌처럼 인적이 드물었다. 완고한 유교의 고장 경북 안동 일직면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5~6세 무렵 석보로 이사 왔고 19세에 의병 지도자인 김영주와 결혼했다. 김영주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듬해 순국했다. 남자현은 ‘과부’가 됐다. 그의 생가는 1999년 복원됐으며 본채와 사당, 동상과 항일순국비 등을 갖추고 있다. 도시와 가깝다면 역사교육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았을 것이다.
묘비 십자가에서도 알 수 있듯 남자현은 신앙인이었다. 동만주로 시댁 가문 사람들과 탈출해 독립운동을 할 때 남자현은 교회 및 기도처를 12군데 개척할 정도로 신실했다. 아들 김성삼에 따르면 ‘기도하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그를 잘 모른다. 이완용을 처단한 평안도 출신 기독 청년 이재명 의사처럼 말이다.
남자현 연구자 강윤정(안동대 교수)은 “만주라는 공간에서 여성이 무장활동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으나 그가 자신의 길을 꿋꿋이 열어간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며 “남자현은 유학 경전을 읽으며 대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동시에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근대 여성으로 나갔다”고 평가했다.
이 믿음의 근대 여성은 총을 들고 만주 농어촌을 순회하며 민족 계몽운동을 펼쳤다. 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보고 그곳이 기도처가 되면 예배당을 세웠고 예배당을 중심으로 교육과 전도를 했다. 특히 ‘여자교육회’ 등을 조직해 여성 교육에 힘썼다.
그가 동만주행을 결행한 것은 40대 후반, 3·1운동이 발생한 1919년 3월 9일이다. 유복자였던 아들과 함께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며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들어갔다. 그는 영양에서 소문난 효부였다. 더욱이 아버지 남정한은 후학을 길러낸 안동 유생이었다. 그렇다면 유교적 틀 안에서 자라고 시집간 남자현이 예수를 믿음으로 차별이 없다(롬 3:12)는 말씀을 어떻게 가슴에 새긴 걸까.
‘1910년 무렵 영양 석보면 포산동에 포산동교회가 설립되는데 이는 석주 이상룡(독립운동가)의 동생 이상동과 그의 아들 백광 이운형(독립운동가·1892~1972)이 세운 교회였다. 이들은 1909년 포산동으로 이주해 예배당을 설립하고 농업개발 및 성서연구에 매진한다. 1919년 예배당이 신축된다.… 남자현과 지역적 연고가 깊고 이운형과 연계 가능성이 크다.… 이운형이 만주와 국내 3·1운동 연계를 위해 국내에 들어와 다시 만주로 갔을 때가 남자현의 영양 탈출과 같으므로 결국 남자현의 만주행에는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강윤정 연구 논문)
그 포산동교회를 찾는 데 애먹었다. 마을도 교회도 기억하는 이들이 없었다. 생가지 인근을 헤매며 노인들을 만나 물은 끝에 포도산(748m) 정상 인근 분지 형태의 마을에 이르렀다. 생가지에서 13㎞ 떨어진 곳으로 요즘과 같은 시대에 이처럼 오지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마치 영화 ‘동막골’을 보는 듯했다. 화전마을로 형성된 포산동은 백두대간 트레킹을 하는 이들이나 찾는다. 8가구가 산다. 물론 1인 가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東만주에 12교회 세운 잊혀진 신앙인
눈에 띄는 팻말이 있었다. ‘머루(포산)산 성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신앙공동체를 이뤘고 1814년 배교자의 밀고로 파괴돼 순교자를 낳은 곳이다. 일경에 쫓겨야 했던 이상룡 선생, 또 이상동 이운형 부자도 천하의 요새 같은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한때 70여명이 출석했다.
“제가 초등학교 때까지(1970년대) 포산동교회에 출석했어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때 사탕과 달걀을 받는 재미로 다녔어요. 지금이야 차가 들어오지만, 그때는 산길만 있었죠. 80년대 폐쇄됐을 겁니다.”
타지에 살며 텃밭을 가꾸기 위해 들어왔다는 이곳 출신 중년 농부가 옛 예배당 터를 알려주며 증언했다. 핍박받던 의병 가족 남자현 일가는 이 깊은 산속에서 안동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하며 기도하고 교육을 받았다.
또 한 사람의 연구자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선생은 2014년 동만주 열두 교회 개척자 남자현이 감옥에서 곡기를 끊고 별세한 후 그가 묻힌 하얼빈 옛 외국인 공동묘지 내 남자현묘지터를 찾아낸 인물이다. “독립은 먹고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남자현의 기도를 쫓아 거기까지 간 것이다. 비신앙인인 그가 세상의 기독교인들에게 말했다.
“왜 한국교회는 갇히고 매 맞아 가며 동포의 정신을 일깨우고 열두 교회를 세워 해방을 염원했던 남자현 같은 신앙인을 알려고 하지 않나요. 왜 ‘유관순’ 한 분만 있다고 생각하나요.”
영양=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