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올해는 가을이 오기 전에 꼭 국화 화분 하나 거실에 두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허겁지겁 살다 보니 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내년을 기약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국화를 두고 쓴 옛글을 읽었다.
16세기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 중에 하수일(河受一)이라는 분이 있었다. 음력 2월에 초당을 수리하고 마루 아래에다 국화와 접시꽃을 심었다. 국화는 서른아홉 포기 넉넉하게 심고, 접시꽃은 한 포기에 줄기가 셋으로 뻗은 놈으로 골라 심었다. 음력 3월에 상추씨를 구해다 그 곁에다 뿌렸다. 상추는 2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순이 돋더니 4월이 되자 밥상에 올랐다. 6월이 되자 상추에서 꽃이 피고 씨앗이 맺혔다. 이로써 넉 달 만에 상추의 일생은 끝이 났다. 접시꽃이 그즈음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세 줄기 마디마다 가지런히 꽃이 붙었다. 먼저 맺힌 봉우리가 먼저 피고 다음에 맺힌 것이 다음에 차례대로 피어났다. 비단처럼 찬란하고 사발처럼 둥근 꽃이 피고 지더니, 7월이 되자 꽃이 모두 다 저버렸다. 접시꽃의 일도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국화는 7월이 되어서도 잎만 빼곡하게 푸르고 꽃이 필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음력 9월이 되어 맑은 서리가 엄하게 내리자, 꽃망울이 막 터지기 시작하더니 황금빛 꽃이 눈에 가득하고 기이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소나무와 매화나무, 대나무와 함께 그 곧음에 탄복하고 그 절조를 감상하였다. 이에 국화도 그 일을 마쳤다. 이 세 종의 식물을 보고서 하수일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떤 것은 먼저 심었는데 나중에 결실을 맺고 어떤 것은 나중에 심었는데 먼저 결실을 이루었다. 먼저 결실을 이룬 것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나중에 결실을 이룬 것이라 하여 또한 어찌 좋지 않다 하겠는가? 내가 여기에서 사군자(士君子)의 출사(出仕)에 대해 유추하여 확대해보았다. 저렇게 나중에 나아가 먼저 벼슬을 얻은 자는 비유하자면 상추요, 먼저 나아갔지만 나중에 벼슬을 얻은 자는 비유하자면 국화다. 먼저도 아니고 뒤처진 것도 아닌 것은 비유하자면 접시꽃이다. 나는 비로소 일반적인 사물이 늦고 빠른 것이 제각기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하여 빠르다 하여 어찌 기뻐하겠으며, 나중에 하여 늦었다 한들 어찌 원망하겠는가! 사람들이 또한 처음 절조를 지키는 것은 쉽지만 늦게 절조를 지키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차라리 9월의 국화가 될지언정 6월의 상추가 되지 않으리라.’
하수일은 상추와 접시꽃, 국화를 직접 재배하면서 관찰한 바를 지식인의 벼슬살이로 연결하여 성찰하였다. 금방 뿌려 금방 먹는 상추도 좋고, 적절한 시기에 화려한 꽃을 피우는 접시꽃도 좋지만, 다른 꽃이 다 진 늦가을에 고고하게 꽃을 피우는 국화가 더욱 좋다. 상추나 접시꽃 혹은 국화 중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는 조물주에 달린 문제이니, 남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자신을 탓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몇 달 만에 금방 수명이 사라지는 상추보다는 출발은 늦더라도 그 마지막에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국화가 사랑스럽다.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느지막이 자신의 역량을 한껏 보여주는 삶이라면 그보다 좋을 것이 없겠다. 국화를 보고 하수일은 이런 삶의 공부를 하였다.
빨리 자라도록 싹을 들어 올렸다가 말라 죽게 하였다는 알묘조장( 苗助長)의 고사는 그 옛날 맹자가 한 말이니, ‘빨리빨리’ 이 한 가지 마음으로 영달하고자 하는 조급함은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국화를 보고 조급함을 경계한 글이 제법 눈에 띈다. 사실은 아니지만, 아흔에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의 주인공 홍유손(洪裕孫)은 출세가 늦다고 불평하는 후학에게, 국화가 이른 봄에 싹이 돋고 초여름에 자라고 초가을에 잎이 무성한, 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라 하고, 세상만사는 일찍 이루어지는 것이 재앙이라 하였다. 국화를 보고 요즘 유행하는 ‘축적의 시간’을 배울 일이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