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은 우리가 먼저 받은 은혜… 이웃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

입력 2019-10-23 00:04
중앙성결교회 성도들이 2017년 12월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 인근에서 열린 ‘행복 나눔 생명운동 캠페인 사랑의 연탄나누기 행사’에 참여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중앙성결교회 제공

긍휼을 뜻하는 영단어 컴패션(compassion)은 ‘함께 한다’는 컴(com)과 ‘고통당한다’는 패션(passion)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은 ‘함께 고통을 당함’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역지사지의 자세로 이웃의 신을 신고 그의 자리에서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라하밈(rahamim)이라 합니다. 이는 자궁이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자기 태에서 나온 자녀를 향해 품은 어머니의 자연적이고 내재적인 깊고 부드러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한자 긍휼(矜恤)에는 상대를 끌어안고 자기 피를 흘려서라도 도와준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말로 긍휼의 자세, 모범, 행동규범 등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긍휼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입니다.

은혜이자 의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긍휼을 실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자 죄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낸 구원자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로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안내자로서 이미 한없는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고 그분의 기이한 빛을 세상에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둠에 있던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긍휼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됐을 때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요 긍휼입니까.

긍휼은 베푸는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줍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을 베풀면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인생길을 가는 동안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참된 긍휼은 값싼 동정심과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긍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긍휼은 그가 당한 곤경을 공감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기꺼이 시간과 물질을 들여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고 그 사람의 마음마저 돌보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내게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자기가 먼저 받은 긍휼을 겸손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차원 높은 사랑

긍휼의 대상은 곤경에 처한 이웃이나 동료만이 아니라 원수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가족과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지속해서 해를 끼치는 원수를 사랑한다면 이는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더 높은 사랑, 즉 긍휼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렇듯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면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람은 원수들을 향해서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 내가 하나님께 그런 원수였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내 원수에게도 아직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긍휼은 무관심과 분노가 지배하는 현대에서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높은 벽을 허문 것처럼 말입니다. 긍휼은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게 하는 능력

현대인은 긍휼을 저열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현대인의 생활신조는 ‘자립’ ‘자율’ ‘독립’입니다. 물론 이들도 선한 가치입니다. 타인 의존적인 삶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한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홀로서기와 자립이란 미명으로 합리화해선 안 됩니다. 빈곤 퇴치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와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미국 MIT 교수는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는 없지만, 실행 가능한 방법과 좋은 의도를 품은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기성 탐욕성 합리성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던 경제학 이론에도 현재는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경제를 존속시키면서도 바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배려와 긍휼임을 학계에서도 인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긍휼은 결코 타인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이타적이며 희생적인 성품으로만 정의돼서는 안 됩니다. 당장은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처럼 보여도, 내가 몸담은 공동체를 살리고 내게도 유익이 되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처럼 긍휼은 모두를 살리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긍휼은 자격 없는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동시에 자격 없어 보이는 이웃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기도 합니다. 외롭고 힘든 이들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긍휼은 하나님의 자녀가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성품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한기채 목사<중앙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