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결도 못한 채… 또 英하원 문턱 못넘은 브렉시트 합의안

입력 2019-10-21 04:05
브렉시트를 반대하며 ‘제2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19일(현지시간) 런던 시내에서 영국 국기와 유럽연합(EU)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가를 위해 브렉시트 재앙을 막을 국민투표를 실시하라’고 적힌 팻말이 보인다. 시위 주최 측인 ‘피플스 보트’는 트위터에 “브렉시트 위기를 해결하려면 보리스 존슨 총리가 아니라 국민이 최후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AFP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유럽연합(EU)과의 협상을 통해 내놓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합의안 표결이 미뤄졌다. 하원이 브렉시트 이행 관련 법률이 모두 정비될 때까지 합의안에 대한 승인을 보류토록 하는 수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오는 31일로 예정됐던 브렉시트 시한은 또다시 연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영국 하원은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이후 37년 만에 극히 이례적으로 토요일에 문을 열었다. 존슨 총리가 EU와 체결한 새 브렉시트 합의안을 표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브렉시트를 완수한 총리로 남길 바랐던 존슨 총리의 야심은 하원 문턱에서 물거품이 됐다. 하원이 브렉시트 합의안에 제동을 건 것이다. 하원이 브렉시트 합의안에 제동을 건 것은 전임 테리사 메이 총리 시절 세 차례를 포함해 이번이 네 번째다.

영국 하원은 존슨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 직전 보수당 출신 무소속 의원인 올리버 레트윈경의 발의안에 대한 투표를 먼저 진행했다. 소위 ‘레트윈 수정안’으로 불리는 이 발의안은 브렉시트 이행 법률이 최종적으로 영국 의회를 통과할 때까지 존슨 총리 합의안에 대한 의회의 판단을 미루자는 내용이 골자다.

존슨 총리 합의안이 승인 투표에서 가결돼도 이행 법률 제정 등 후속 절차를 완료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브렉시트 예정일인 31일까지 관련 절차를 마치지 못할 경우 의도치 않은 ‘노딜(합의 없는) 브렉시트’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한 보험 성격이다. 레트윈 수정안은 범야권의 지지 아래 찬성 322표, 반대 306표로 가결됐다.

수정안 통과는 존슨 총리에게 이중의 굴욕을 안긴 셈이 됐다. 존슨 합의안에 대한 투표를 미룬 것은 물론 존슨 총리가 EU에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국 하원은 지난달 EU 정상회의 마지막 날까지 EU와 브렉시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거나 의회에서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 존슨 총리가 직접 EU 측에 브렉시트 3개월 추가 연기 요청 서한을 보내도록 하는 ‘노딜방지법’을 마련해뒀는데 이날이 그 마감 시한이었다.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하느니 시궁창에 빠져 죽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존슨 총리는 이 법에 따라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브렉시트 연기 요청 서한을 보냈다. 아울러 ‘브렉시트 연기는 실수’라고 주장하는 별도 서한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BBC와 가디언 등은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연기 요청 서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브렉시트 연기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에만 자필로 서명했다”고 전했다.

존슨 내각은 브렉시트 이행 법률을 신속히 마련해 다음 주쯤 다시 의회 표결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연정 파트너인 북아일랜드민주연합당이 여전히 존슨 합의안에 반기를 들고 있어 통과가 불투명하다. 강경 브렉시트 진영을 이끌고 있는 나이젤 패라지 브렉시트당 대표조차 “존슨의 합의안은 메이와 95% 같다”며 반발하고 있다.

AP통신은 EU가 노딜 브렉시트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추가 연기를 승인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렇지만 브렉시트가 연기된다 해도 존슨 합의안이 하원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면 혼란 반복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