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이 최근 양국 고위급 특사 채널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 및 기업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방안을 비밀리에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주 이낙연 국무총리의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 참석에 앞서 한·일 갈등을 풀기 위한 협상이 물밑에서 진행된 것이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모두 특사 간 협의 내용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예정된 이 총리와 아베 총리 간 회담이 절충안 마련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17일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 고위급 인사가 최근 수차례 일본을 방문,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른 일본 전범 기업의 자산 매각 문제에 대해 일본 측 고위 대표단과 협의했다. 협의에서 양측은 피해자 배상을 위한 현금화 조치에서 발생하는 일본 기업의 피해를 한국 정부가 신속히 보전해주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한다.
또 현재 소송 중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지원받았던 한국 기업과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일본 기업은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놓고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범기업 자산 매각에 대한 사법부 판단에 개입할 수 없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추가적인 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일부 수용한 안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 모두 양국 고위급 협의 결과가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일본에서 이행해야 할 배상 문제에 깊이 관여해야 하는 등 일본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방안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일본 기업의 자산매각 절차 자체를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해석된다.
한·일 양측이 고위급 접촉에 나선 것은 이 총리의 방일과 다음 달 23일로 예정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공식 종료를 앞두고 현실적인 타협안을 찾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내년 초로 예상되는 일본 전범기업의 자산 매각이 현실화될 경우 양국 갈등이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물밑협상의 배경이었다.
지난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토대로 피해자들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압류자산 매각명령을 법원에 신청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 조치가 진행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징용 피해자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지난 6월 이른바 ‘1+1안’(한·일 기업 출연금으로 위자료 지급) 방안을 제안했지만 일본 측은 거부했다.
양국은 지난 8월 이후 외교장관 회담과 국장급 만남 등을 통해 협의를 지속하고 있지만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정한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다키자키 시게키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지난 16일에도 국장급 협의를 했으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한 양측의 원론적 입장을 주고받았다. 정부 당국자는 협의 직후 “1+1이 유일한 방안은 아니고, 그걸 토대로 피해자들과 양국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간극은 아직도 꽤 크다”고 말했다.
이상헌 손재호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