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사회안전망·예산 태부족… 결국 사건 터져야 개입하는 국가

입력 2019-10-17 04:06

3살과 생후 9개월 된 아이 2명이 아빠 손에 죽었다. 당시 아빠 A씨는 몇 달째 환청에 시달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다. 나 때문에 가족이 큰 고통을 받을 것 같다. 차라리 모두 죽어야 한다”는 망상에 빠졌다고 한다. 치료감호소 감정 의사는 ‘중증도 우울증 에피소드 상태’라는 진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보고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환청에 따른 두려움과 공포는 그의 삶에 누적돼 왔었다. 그는 이미 1년 전 우울증 진단을 받아 상담치료를 받았었다. 잠시 증세가 호전되는 듯했지만 이듬해 재발해 다시 8차례 치료를 받았다. 이 기간 아빠는 지속적 환청에 시달렸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법원도 “꾸준한 관리와 경과 관찰이 필요하지만 지속적·전문적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극심한 우울증에 이미 한 차례 자살을 시도한 상태의 위태로운 한부모 가장이 재차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시도를 하려 한 사례도 있다. 아빠 B씨는 경제적 어려움 등의 처지를 비관하다 집에 불을 질러 죽으려 했지만 실패해 한 차례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부인과 불화를 겪다가 별거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우울증과 불면증 증세가 심해져 정신병원 진료를 받았다. 당시 아빠는 술에 빠져 지냈고, 결국 엄마와 이혼했다. 이후 주변에 아이와 함께 죽겠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부인과 이혼한 지 3주 만에 두 아이를 살해하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 사건 당시는 보호관찰부 집행유예 기간이기도 했다. 위험의 신호가 계속됐지만 누구도 아이들의 위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려보면 사건 직전의 아이들은 절박하고 다급한 위기 상황이었지만 국가는 그들을 ‘구출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학대가 분명한 상황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 국가가 양육에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살해 후 자살 피해 아동의 인권은 사건이 발생한 뒤에야 사법절차 과정에서 가해자 양형을 위해 언급될 뿐이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10조)는 조문에서 부모에 의해 생을 마감한 위기의 아이들은 제외됐던 셈이다.

여러 사례에서 위기 신호는 감지됐다. 아동보호단체 관계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가 미수에 그친 가정에서 또다시 비슷한 선택이 발생할 우려가 높다”며 “사건 직후에는 아동을 분리해 보호를 하지만 원가정으로 복귀하고 난 후에는 관련 단체나 기관들이 해당 가정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보호할 방안이 없다”고 토로했다. 자녀 살해 후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고위험군 가정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개입과 집중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전문가들은 법원이나 검찰 등이 동원할 수 있는 강제성을 연계해 보다 치밀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를 위해선 “관련 기관들이 사례를 충분히 깊게 관리할 수 있도록 상담 및 관리 전문가 인력 확충도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뒤따랐다.

부모의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각 기관들의 모니터링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현실 역시 문제로 꼽혔다. 한국아동복지학회 회장인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 현재 있는 고위험군 가정 발굴 시스템에서도 개인정보 문제로 기관 간 정보교류가 안 돼 사례자 추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아이들의 생명보다 중요한 개인정보는 없다. 복지 분야에서의 개인정보는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의 정신건강센터나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중증 우울증 진단이 나오고 아이의 위기가 감지될 경우 곧바로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제도상으로는 사건이 터진 뒤에야 개입이 가능하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도 “우울증 상담과 같은 정보는 민감한 개인정보로 여겨지기 때문에 살해 후 자살의 가능성이 높더라도 아동보호기관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복지 체계의 단계마다 개인정보 보호라는 철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지 그 기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사회안전망 역시 점검 대상이다. C씨는 남편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 7개월 후 정신적 충격에 자신도 같은 선택을 하면서 딸을 살해했다. 그의 집에선 “남편이 숨진 뒤 너무 힘들다. 딸이 아빠를 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C씨는 사건 전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에서 상담을 받기도 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평소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변에서 그의 사정을 파악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은 “자살 유가족이었다면 최소한 사건 당시 경찰을 만났을 테고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을 만났을 것”이라며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건 이후 경찰이나 소방관, 공무원들이 자살 유가족에게 지원 서비스를 안내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는 방안이 마련됐지만 미리 발견하는 시스템이 충분치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활동가는 “극단에 몰린 사람들이 도움 받을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와 공적 자원의 부족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의 빈번한 발생은 국가의 방치와 외면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다. 양두석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자살예방센터장은 “살해 후 자살 고위험군에게 심리치료,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 위한 예산이 너무 적다”며 “적어도 우울증인 사람이나 자살 유가족, 자살 시도자 등 고위험군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이라도 국가의 개입을 의무화하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주언 김유나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