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오죽했으면…” 지나친 온정주의가 사회적 해결 여지 줄여

입력 2019-10-17 04:02

‘소유물’ ‘살인자’ ‘오죽했으면’ ‘부모심정’ ‘아이는 무슨 죄’ ‘헬조선’ ‘무책임’ ‘이기적’….

국민일보가 지난 7일부터 시작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 기사에 대한 독자 반응을 단어 빈도수 추출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들이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은 대체로 가해자에 대한 비난과 동정이 혼재돼 있었다.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가해부모를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살인자로 비난하는 여론과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며 동정하는 목소리다.

무책임, 이기적이라는 단어는 비난이나 동정 의견에 공통적으로 사용됐다. ‘혼자 죽는 게 무책임하다’라거나 ‘자녀도 비루하게 살 텐데 놔두고 가는 게 무책임’이라는 식이다. 이기적이라는 표현 역시 ‘왜 자녀 목숨을 건드리느냐’ ‘비참한 현실에 혼자 살라는 것이냐’ 취지의 글로 양쪽에서 나타났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사회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어떻게 외면하고 방치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건 발생 원인을 가해부모의 게으름, 무능력, 나약함 등에서 비롯된 개인적 문제로 치부해버리거나, 반대로 가해부모의 범행을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로 인해 사회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현장에서 아동보호 및 자살예방 활동을 펼치는 전문가들은 이런 인식의 전환이 급선무라고 16일 제언했다.


빗나간 온정주의

국민일보가 아동보호·자살예방 활동가 및 전문가 26명을 상대로 한 설문(요청에 따라 익명 진행)에서 비극이 되풀이되는 원인으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에 대한 온정적 사회 분위기가 지목됐다. 한 전문가는 “관련기사만 봐도 궁지에 몰린 한 가정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시각의 댓글이 많이 달린다”며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은 무고한 자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명확한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 분석 보도 1~4회 기사에 달린 댓글(지난 11일 기준) 중 구체적인 의견을 표명한 1136개를 추려 분석한 결과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공감·비공감 의견이 드러난 댓글 인식 조사에서는 32.3%가 가해자를 이해하거나 동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혼자 못 죽는 부모 심정도 이해한다” 등 가해부모가 처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가해자 부모를 탓하면서도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한다는 복합적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나 살림이 퍽퍽했으면 그랬을까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애꿎은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식이다.

가해부모의 선택을 비난한 독자들 사이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오롯이 부모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경향도 확인됐다. 사건의 책임을 지적한 반응 중에서는 53.3%가량이 가정이나 개인을 언급했다. 원인을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는 댓글에서는 가해부모를 이해한다는 반응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왔다.

피해자인 아동이 언급된 경우는 전체 글 중 16.9%에 불과했다. 사회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피해자인 아동보다는 가해자인 부모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무의식에 녹아든 가장 책임론

아동보호·자살예방 단체 소속 활동가들은 온정주의 이면에 가부장적 가족문화가 깔려 있는 것으로 봤다. 한 활동가는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동정하는 사회인식은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오죽했으면’이라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자녀의 생명권을 부모에게 종속시켜 생각하는 부분이 크다”는 답변도 있었다. 다른 응답자는 “가부장적 가족 개념이 강해 가족의 주인은 가장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고, 상대적으로 아동(미성년)에 대한 인권의식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며 “살해 후 자살은 가족을 이끌 수 없는 가장이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방법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죽했으면’이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은 ‘한국의 사회안전망이 촘촘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국민이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녀의 양육자는 오로지 부모라는 시각을 바탕으로, 본인의 돌봄 없이는 아이를 도와줄 곳이 없고 시설 등에서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한 응답자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부모가 없으면 자녀의 삶이 고되리라는 확신으로 인한 안타까움”이라고 말했다.

한 자살예방 활동가는 “가족이 당면한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며 “실업이나 경제적 문제, 정신과적 문제 모두 개인의 능력이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병리 현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극심한 트라우마

미수로 살아남은 아이들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고통받는다. 어릴수록 자신이 입은 피해가 극단적인 형태의 학대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누구나 이렇게 살아간다’고 무의식 중에 받아들일 우려가 높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초등·중학생 피해아동에게서는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과도하게 위축된 모습이 나타나며, 또래 관계에서 스스로 고립되거나 흡연·음주·자해 등 자극적인 비행행동에 빠지는 경우도 흔히 관찰된다고 한다. 상담사 등은 성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집중력 부족, 우울증, 학교생활 부적응 등을 목격했다고 했다.

살해 후 자살 사건 피해자녀들은 부모가 자신을 버리려 했다는 생각에 더 큰 애정에 집착하거나 거꾸로 두려움·분노 등을 느끼는 양가감정 속에서 지독한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한 상담사는 “부모가 자신을 상대로 어떤 끔찍한 시도를 했었는지 알면서도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라고 말했다.

김판 정현수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