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우리의 나라

입력 2019-10-17 00:04

‘우리’라는 말도 ‘나라’라는 말도 함부로 쓰기 어려운 시절이다. 네가 말하는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냐. 네가 말하는 ‘나라’는 어떤 이념에 근거한 나라냐. 수개월간 시민들은 두 쪽으로 갈라져 광장에 섰다. 양쪽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사람들은 방관자나 비겁자, 혹은 기회주의자로 응시됐다. “중립은 없다!” 나라가 간당간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에 양자택일만이 답이라는 목소리는 광화문에서도 서초동에서도 들려왔다.

오프라인으로 나타나 인증사진은 찍지 못할지언정, 그래도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서는 어느 편인지 드러내겠지, 내심 기대하던 사람들은 내게 개인적으로 실망을 표했다. ‘침묵은 동조’라는 비난도 따라왔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나대로 치열했다. 검찰 개혁이니 공직자의 자격이니 기사의 중립성이니, 시민들을 모두 들썩거리게 만든 일련의 문제들을 놓고서 나도 내 길 위에 서 있었다.

내 길은 강단이었다. 그곳에서 다음세대들에게 내가 믿는 ‘우리’와 내가 소망하는 ‘나라’를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의 나라’가 어느 당의 주도하에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믿는 ‘우리의 나라’는 내 편에 해당하는 사람의 부정행위는 감싸고 네 편에 해당하는 사람의 부정행위는 물어뜯는 공직자 전문가 시민으로 가득한 나라는 아니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예수의 윤리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이다.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으면서 충분히 개혁과 혁명의 힘을 가진 행동강령이다. 혈통에 따라 특정한 가문의 자녀들만 귀히 여김 받는 나라는 분명 하나님 나라와 멀다. 그런데 한때 전근대를 살던 유럽의 기독교 귀족들은 신분제에 근거를 둔 나라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인종에 따라 특정한 사람들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나라도 하나님 나라와는 멀다. 그런데 신앙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험한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던 신실한 청교도들은 ‘우리의 나라’를 건국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흑인들과 토착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이 놓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가치였다.

도대체 누가 ‘우리’인가? 귀족만, 백인만을 위한 나라는 아무리 풍요롭고 안전해도, 결코 하나님 나라에 가깝지 않다. “저는 지금 노동 현장의 인간화를 위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저는 다음세대의 존속을 위해 더 시급하다고 믿는 환경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현장에 서 있습니다.” 결코 중립이나 기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더 크게 보고 멀리 보고 포괄적으로 보면서 내 자리에서 ‘좋은 나라’를 만들고 있다고 외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최근 들리기 시작한다. 몹시 반가운 일이다.

서 있는 길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지향해야 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은 같아야 한다. ‘너희들’을 몰아내고 ‘우리들’이 권력을 장악해야 나라가 나라답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느 편의 생각이든 하나님 나라와 멀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나라’는 당 짓고 편 가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긴 예수께서 종국에 십자가라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까닭도 그의 나라를 오해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열심당의 일원인 가룟 유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독립된 영토와 강한 통치자를 가지는 유대인들만의 메시아 왕국을 의미했다. 제사장들은 예수의 나라가 자신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허물어 버린 폐허’ 위에 건설되는 줄 알고 그를 제국의 권력에 넘겨버렸다.

종교든 정치든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가 완전히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담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라’며 우리에게 바통을 넘겨주시는 대신 그 ‘나라’를 완성하려 하셨을 거다. 예수께서 이미 시작하신 그 ‘나라’는 결코 불의한 수단도, 대의를 위한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를 배제하지도 혐오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나라’는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어느 길 위에서든 지속적으로 우리의 외연을 넓히고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정의롭다면 말이다.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