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WTO 개도국 지위 포기에 무게… 농민 달랠 대책 마련 고심

입력 2019-10-16 04:09
사진=신화뉴시스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두고 막판 고심에 빠져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정한 마감 시한(오는 23일)이 다가온다. 정부 내부에선 개도국 지위 포기로 공감대가 모아져 있다. 하지만 농민, 일부 지방자치단체 반발을 우려해 최종 결정을 늦추고 있는 상태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 발표’에 앞서 농민을 달래기 위한 공익형 직불금제 도입 등 여러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15일 “지난 8월부터 여러 차례 관계부처 협의를 면밀하게 진행해 왔다. 현재는 부처 간 이견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미국 출장길에 오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돌아오는 대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고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당초 회의는 이번 주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홍 부총리가 21일까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자연스럽게 연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외경제장관회의는 통상 부총리가 주재한다.

정부는 지난 7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개도국 지위 문제를 거론하자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국가가 WTO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며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90일 이내에 개도국 지위 관련 진전사항을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이어 “WTO가 90일 내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았었다.

이미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 고소득국가 56개국’ ‘세계상품교역의 0.5% 이상 차지하는 국가’라는 4가지 기준을 정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해당하면 개도국이 아니라는 입장을 담은 제안서를 지난 2월 WTO 일반이사회에 제출했다. 공교롭게도 한국은 4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유일한 국가다. 2개만 해당되는 싱가포르와 아랍에미리트(UAE)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경고문’을 올린 지 1주일 만에 개도국 지위 포기를 공식화했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유지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다. WTO에서 한국의 개도국 지위를 두고 문제 제기가 많아지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과의 대치 구도는 부담스럽다. 이에 개도국 지위 포기에 무게를 둔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현행 관세나 보조금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본다. 현재로서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차이로 차기 WTO 농업협상 개시 가능성조차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등의 무역자유화를 논의하는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2001년 시작됐지만 아직도 타결을 못하고 있다.

관건은 농민들이다. 농민단체들은 “한국의 농업이 개도국 대우를 받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업 포기 선언과 다름없다”며 반발한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그동안 우루과이라운드(UR)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과정에서 농업이 제조업을 위해 희생됐다는 정서가 강하다. 정부가 농민들의 이런 정서를 잘 어루만지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업의 공익적 역할을 부각하고, 현재 시행 중인 쌀 직불제를 개편하는 ‘공익형 직불제’를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