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눌 말씀은 시편 150편 4~6절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통해 생각이 아니라 감정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감각 장애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앞을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것 등이다. 몸이 마비돼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나 촉각이 사라져 느끼지 못하는 것 모두를 심각한 장애로 여긴다.
그러나 감각 장애보다 더 심각한 건 감정 장애다. 앞을 보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보지 못하는 대신 더 잘 듣고 섬세하게 느끼는 분들도 많다. 듣지 못하는 만큼 더 자세히 보려 하고 온몸의 세포로 사물을 관찰하는 이들의 모습은 경이롭다.
감정 장애야말로 불행의 근본 이유다. 많은 돈을 가졌거나 인기를 누리며 권력의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불행해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가진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도 허무의 늪에 빠져 고통스러워한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극단적 분노를 쏟아내거나 우울증에 빠져 웃음을 잃기도 한다. 모두 감정이 건강하지 못해 생기는 일이다.
인간 뇌의 발달단계를 보면 감정이 생각보다 앞선다는 걸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뇌는 세 단계로 발전한다. 생존을 담당하는 뇌간이 가장 먼저다.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뒤를 잇는다. 아기가 태어날 때 감정을 경험하고 기억을 담아내는 변연계가 만들어진다. 그다음 이성과 논리적 사고, 언어를 담당하는 대뇌가 발달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뇌 발달 순서가 생존, 감정, 이성과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어를 주시기 전에 감정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감정을 먼저 받으시길 원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느끼고 있니”라며 감정을 먼저 묻는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의 출발점은 경이로움이다.’
전율을 일으키는 표현이다. 철학의 출발점이 물음표가 아니라 감탄사라는 의미다. 묻고 따지고 추론하는 것에서 철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를 느끼는 감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동양고전 ‘맹자’에 ‘수무족도(手舞足蹈)’라는 말도 있다. 인간이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이르면 춤을 춘다는 뜻이다. 손과 발이 움직여 춤을 추는 것도 일종의 감탄사다. 깨달음도 생각의 세계가 아니라 감정의 세계라는 의미다.
성경의 가운데를 펼치면 시편이 나온다. 시편은 감탄사로 가득하다. 다윗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정 표현이 시편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수무족도의 경지처럼 시편의 마지막인 150편도 춤의 세계로 끝이 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고백도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감정보다 생각을 우선시한다. 감정 표현을 낯설어한다. 자신 안에서 생성되는 감정을 스스로 외면해 버린다. 마음 안 금고에 감정을 넣고 열 수 없는 자물쇠로 잠가 버린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한 뒤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을 표현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대표적인 감정 표현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정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꺼내 놓아야 한다. 기쁨과 감사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시편처럼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고백해야 한다. 분노와 슬픔까지, 원망과 억울함까지 하나님 앞에 쏟아내야 한다.
욥과 모세,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게 했다. 우리를 감정으로 대하는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으로 나가는 사람은 건강한 감정을 갖게 된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