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카리스마

입력 2019-10-11 03:59

서양 동화 중에 ‘벨벳 토끼’라는 이야기가 있다. 잠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새로 들어온 토끼 인형이 아이의 오랜 친구인 말 인형에게 묻는다. “나는 진짜 토끼가 되고 싶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와 상관없어.” “진짜가 되기 위해선 많이 아파야 해?” “때론 그래. 하지만 진짜는 아픈 걸 두려워하지 않아.” “그럼 진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토끼 인형의 질문은 끝이 없다. “아이가 너와 함께 놀고, 너를 오래 간직하면 돼. 그러니까 아이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 진짜가 되는 거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21살에 수도사가 되어 평생 금욕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엄격한 고행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마음속 불안을 달래주지 못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화를 내고 있고 실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1:17에 이르러 숨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때 그는 자신이 이미 천국 문을 통과했다고 술회했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 선언하는 은혜임을 깨달은 것이다.

루터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사도세자가 떠오른다. 생각할 ‘사(思)’에 슬퍼할 ‘도(悼)’, 아버지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후 이렇게 ‘슬픔을 생각하다’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는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보았다. 태어나자마자 그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고, 두 살부터 왕세자 교육을 시작했다. 고맙게도 아들은 총명했고,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다. 하지만 열 살 무렵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세자가 칼 놀이와 그림 그리기에 빠진 것이다. 어느 날 자기가 만들어준 책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 기대하며 아들의 처소를 찾은 영조는 큰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라를 망치려 작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밤새워 만든 책을 어찌 이리 홀대하느냐” 아버지의 질타는 이후 끊임없이 이어졌다.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거냐.” “어찌 이런 아비에게서 저런 자식이 나왔단 말이냐.” 결국 아버지의 입에서 자식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나오고야 만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가던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영화 ‘사도’ 중에서)

성서를 보면,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복음 1:11) ‘너’를 기뻐한다고 하셨다. ‘네가 이룬 것’ ‘네가 나를 위해 해 준 것’을 기뻐한다 하지 않으셨다. 영조의 화법으로 바꾸어 말하면, ‘너는 존재 자체가 기쁨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국인들은 ‘카리스마’라는 말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은 신약성서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그 말이 바로 카리스마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 같은 은혜, 성서는 그것을 카리스마라고 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협박하는 것이고, 둘째는 매수하는 것이며, 셋째는 감동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종류의 카리스마를 한국인들은 ‘칼 있으마’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루터를 변화시킨 것은 세 번째의 카리스마였다. 여전히 부족한 존재인 자신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카리스마에 그는 전율했고, 바로 이 사랑의 힘으로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 서양의 역사를 바꿨다. 종교개혁의 요체는 ‘사랑받는 법’을 아는 것이다.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보라. 나를 존재 자체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 거기서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된다.

장윤재(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