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아날로그 하나님

입력 2019-10-11 17:50

디지털은 속도를 경쟁력으로 내세우는 시대에 가장 걸맞은 삶의 표현방식입니다. 많은 생각을 모아 정리하여 하나의 철학적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하듯, 수많은 수학 원리들을 하나의 공식으로 집약하여 계산대에 올려놓듯, 인생의 수많은 질문과 답변들을 그리고 알 수 없는 죽음 후의 세계와 신의 존재 증명에까지 이 모든 과정을 ‘신학화(神學化)’하여 종교를 존재케 하였듯이, 디지털 역시 몇 개의 숫자들을 조합하여 수많은 경우의 수를 열거합니다. 그래서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무척 속도감 있고 생산적이며 효율적이고 편리합니다. 몇 개의 숫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나의 스마트폰에서도 그 효력은 막강합니다. 상대의 이름을 일일이 검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메모리 된 단축키 덕분에 숫자 표시를 한 번만 누르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숫자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이끌어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배여 있을 수많은 땀과 눈물은 결코 숫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눈물 콧물, 감동과 감격의 순간들은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표현됩니다. 숫자는 결과만을 보여주지, 그 결과의 숫자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꿀꺽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어찌 보면 내가 요구한 것이 나 편리하게 잘 살고자 하는 것이었기에 그 숫자가 만들어낸 결과의 공적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긴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계속 허전한 것은 인간이 기계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행복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계산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디지털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도의 증가에 따라 아날로그와의 격차를 벌렸습니다. 어느 한순간 디지털의 실체를 알아버린 아날로그는 그와의 불합리한 경쟁을 스스로 포기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길이 아닙니다. 예전에 왔던 추억 속의 길, 그래서 지금은 모두에게 잊힌 그 길을 다시 걸어가며 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지는 작업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길이기에 생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긴장감이 떨어지고 자꾸만 느슨해지는 감이 있지만 이젠 예전과 달리 그 문제점을 알고 있기에 절대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자기 자신이 다시 관심을 보이자 그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묻혀 버렸음 직한 그 길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복고 열풍이 불어 그 길은 이제 유명한 추억의 명소가 되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디지털의 편리함 속에서 불편을 통한 인내를 배울 수 없었고, 인내를 통한 짜릿한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지 사람들은 숫자놀음에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기 원했고, 바람 부는 언덕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껴보기 원했습니다. 방금 샤워 룸에서 나온 사랑하는 여인의 향긋한 머리 내음을 맡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때로 그 작은 행복감 속에서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왕자가 이 땅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 마음속에 사랑과 생명의 따뜻함을 일깨워주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며 살다가 인간처럼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왜 꼭 그래야 했을까. 하늘에서 내려오시지 말고 위에서 간단하게 리모컨으로 세상을 조종하면 되지 않았을까. 1에서 10까지의 10개의 숫자 버튼만 있으면 될 텐데. 그런데 그는 한 번도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예 숫자의 개념을 통째로 뛰어넘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방법으로 살아내기를 하셨던 아날로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으신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아날로그 방식이었습니다.

조규남 파주 행복교회 원로목사

◇행복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입니다. 1991년 겨울 경기도 파주에서 조규남 목사가 개척했습니다. 올해 2대 담임으로 장승원 목사가 취임해 시무하고 있습니다. 독일 가나안공동체(설립자 기독교마리아자매회 바실레아 슈링크)의 수도공동체 영성을 품고 지역을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