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겨룰 민주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경선이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지난 6월 중순까지만 해도 조 바이든(76) 전 부통령과 버니 샌더스(78) 상원의원이 양강 구도를 이뤘다. 특히 바이든 전 부통령은 인지도와 지지율, 모금액 등에서 1위를 놓치지 않으며 ‘대세론’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는 15일 열릴 4차 TV토론을 앞둔 현재 두각을 보이는 인물은 엘리자베스 워런(70·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다.
미 퀴니피악대학 여론조사연구소가 8일(현지시간) 공개한 전국단위 조사에서 워런 의원은 지지율 29%로 바이든 전 부통령(26%)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워런 의원이 전국단위 지지율 1위를 차지한 것은 처음이다. 각종 정치여론조사 결과들을 집계하는 웹사이트인 ‘리얼 클리어 폴리틱스’도 이날 워런 의원이 26.6%로 조 바이든(26.4%)을 0.2% 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오차 범위이긴 하지만 워런 의원이 마침내 선두에 오르며 ‘골든 크로스(지지율 역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리얼 클리어 폴리틱스에 따르면 워런 의원은 지난 2월 민주당 성향의 전국 등록 유권자 중 6% 지지를 얻으며 전체 후보 가운데 4위였다. 하지만 이후 5월 말 지지율 10%대에 진입한 뒤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TV토론을 거치는 동안 샌더스 의원을 일찌감치 제치고 바이든 전 부통령을 추격했다. 샌더스 의원은 지난 1일 심장수술에 따른 건강 문제로 사실상 경쟁에서 멀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이든 전 부통령도 과도한 여성 신체 접촉 논란, 오바마 향수에 의존하는 빈약한 정책 공약 등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스캔들까지 터져 큰 타격을 입었다. 원조를 미끼로 바이든 전 부통령과 그의 아들의 뒷조사를 종용한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 처했지만 바이든 전 부통령 역시 권력형 외압 의혹을 받고 있다. 반면 워런 의원은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달 말 발표된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 여론조사에서 잇따라 1위를 차지하며 전국 단위에서의 순위 변동을 예고한 바 있다. 두 지역은 대선 풍향계로 일컫는 곳이다.
“무너진 중산층을 재건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워런은 샌더스 상원의원과 바이든 전 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데다 정치적으로나 사생활 면에서 깨끗하다. 무엇보다 정책 전문가답게 초대형 IT기업의 분할부터 학자금 빚 탕감, 형법 개혁, 기후 변화, 국방부 계약 등 다양한 사회·경제 분야에서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정책 추진을 위한 재원 대책도 함께 제시했다. 연간 1억 달러가 넘는 기업이윤에 대한 7%의 기업세와 상위 0.1%에 해당하는 최고 부자들에 부과하는 2~3%의 부유세(슈퍼리치세)를 통해 3.75조 달러의 세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워런 의원은 이런 정책들을 자신의 인생 스토리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유권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아버지의 투병으로 가세가 기운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그가 하버드대 교수를 거쳐 상원의원에 오르기까지의 삶은 치열함 그 자체다.
워런 의원은 12살 때 아버지 도널드 존스 헤링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이후 보모, 웨이트리스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공부를 잘하고 토론에 뛰어났던 그는 명문 조지워싱턴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고교 시절부터 사귄 첫사랑과의 결혼을 위해 조지워싱턴대를 중퇴한 그는 휴스턴으로 이사한 뒤 공부를 이어갔다. 아이 때문에 잠시 휴학도 했지만 휴스턴대와 럿거스대 로스쿨을 마친 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전전하면서도 파산법 전문가로 인정받은 그는 1987년 펜실베이니아 법대 교수로 임용됐으며 95년 하버드대 법대로 옮겼다. 78년 남편 짐 워런과 이혼한 그는 2년 뒤 동료 법학자 브루스 만과 재혼했다. 하지만 두 자녀를 위해 워런이란 성을 그대로 썼다.
민주당에서 샌더스 의원과 함께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가 96년까지 공화당원이었다는 이력도 눈길을 끈다. 그의 당적 이적은 95년 파산법 검토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은행들이 이익 극대화를 위해 파산 보호 범위를 줄이는 내용의 새 파산법을 추진하는 것에 맞서 싸웠다. 당시 공화당은 은행 편을 들었고, 10년을 끌었던 파산법 관련 싸움은 검토위원회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이어 이듬해 ‘리먼 쇼크’로 상징되는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그는 다시 주목받았다. 부실자산 구제 프로그램 감독위원회에 합류한 그는 막대한 공적 자본이 부도 직전의 대형 은행에 부당하게 들어가는 사실을 고발했다. 모든 소비자 대출기관을 통제·감독·규제하는 정부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주장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행권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2010년 마침내 소비자보호금융국이 창설됐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수장으로 앉히려 했지만 공화당과 은행권의 반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워런 의원은 2012년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워싱턴 정가에 본격 입성했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 그에 대한 지지는 높다. 하지만 워낙 강성으로 비쳐 민주당을 넘어 부동층까지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로 민주당의 오랜 우군인 실리콘밸리에서는 ‘IT기업 분할’ 공약 때문에 그가 대선후보가 될 경우 트럼프를 지지하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에 이어 ‘강하고 나이든 백인 엘리트 여성’을 후보로 내세우는 것도 민주당엔 부담스러운 점이다. ‘많은 민주당 유권자들이 워런을 사랑하면서도 워런을 우려한다’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좋아하는 후보가 아니라 선거에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는 민주당원들의 고민을 반영한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