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시작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2016년 5월 17일도 그런 경우다. 당시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은 종종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처럼 여겨졌다. 20대 여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한 남성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 경찰과 언론은 조현병 환자가 벌인 범죄로 여겼지만 여성들은 달랐다. “여성 혐오 살인”이라고 판단했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난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과 최근 몇 년 사이에 첨예해진 젠더 갈등도 어쩌면 이 사건이 발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는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촉발된 여성 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복기하면서 한국 여성의 현실을 파고든 작품이다. 대학이나 국회나 시민단체 등지에서 저마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 필자 11명이 참여했다. 이야기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에서 기인한 범죄로 봐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시작해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되는 범죄)가 묵인되는 문화적 배경으로 살핀 뒤,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를 전하는 내용으로 뻗어나간다. 인상적인 부분이 많은데, 가령 사회학자인 오찬호씨의 글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무조건 공감할 필요도 없다. 여성이 왜 이 책에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도 자유다. 하지만 왜 남성을 적으로 묘사했느냐는 식의 불평불만은 생뚱맞기 그지없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왜 고용주를 이렇게 나쁘게 묘사했느냐’ ‘모든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는 것처럼 일반화했느냐’라고 비평하는 모습을 상상해 봐라. 다들 비웃을 거다.”
언론계나 영화계에서 페미사이드를 다루는 방식,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여성 혐오를 심도 있게 파헤친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남성이 읽어야 할 책일 수도 있겠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투 혁명은 이제 시작이며, 결국 이 싸움의 끝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과 닮아 있을 것이다.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진행 중이어야 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